[청라언덕] 역지사지(易地思之)  

입력 2023-06-29 16:10:03 수정 2023-06-29 20:27:11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유광준 서울취재본부 차장

'선출직 공직자 사이에서 서열을 가르는 진짜 기준은 남은 임기다.'

각종 선거가 다가오면 정치권에서 자주 언급하는 뼈 있는 농담이다. 최근에 당선돼 '다음 선거'까지 시간이 가장 많이 남은 인사가 진정한 '갑'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광역시장·도지사-국회의원-시장·군수-지방의원'이 한자리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의전 서열에 따라 자리 배치가 이뤄지지만 이들 사이에서 이른바 '심리적 갑을관계'는 잔여 임기의 길이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지위 고하(대표하는 유권자 수)를 막론하고 '다음 선거'에서 한 번 더 당선되기 위해선 지역구를 공유하는 선출직 공직자들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에 가장 아쉬운 사람은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온 출마 예정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아직 본인 선거까지 한참 남은 '갑'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현직과 도전자들을 저울에 올려 놓고 누가 나중에 나의 재선(再選)에 도움이 될지를 꼼꼼하게 계산한다.

유력 정당의 공천은 물론 유권자들로부터 다시 선택을 받을지는 팔자소관(八字所關)이지만 임기는 보장받는 직종(職種)이어서 그렇다.

이에 실질적으로 지방의원 공천권을 쥐고 있는 현직 국회의원 가운데 일부는 "공천 기준은 딱 한 가지다. 당선 후 돌아서서 딴생각하지 않을 충성심만 본다"고 말한다.

서설(序說)이 길었다. 지역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인 내년 총선 물갈이 원리를 설명하고자 욕심을 낸 탓이다.

대한민국은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운용하고 있다.

내년 4월 실시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마무리되면 윤석열 대통령은 3년, 새롭게 선출된 선량들은 4년의 잔여 임기를 갖는다. 앞서 언급한 '심리적 갑을관계'에 따르면 현직 대통령과 국회의원 사이에서 주도권 역전 현상이 불가피하다. 특히 한국의 대통령은 '다음'이 없다.

여당의 한 중진은 "지금이야 여당 내에서 '우리 모두 친윤'이라는 합창이 나오지만 내년 총선 관련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의 공소시효(선거일 후 6개월)가 만료되는 연말이 되면 여당 국회의원들의 시선은 다음 총선에서 자신의 공천을 좌우할 차기 대권주자(당 대표)에게로 쏠릴 것"이라고 말했다.

얍삽하고 비정해 보이지만 여당 국회의원과 대통령실(용산) 사이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설명해 온 불문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전까지 정치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견제를 받았다. 이준석 전 대표와의 갈등을 떠올리면 여당 내 친위 그룹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터다.

더욱이 성공한 대통령, 아니 최소한 실패한 대통령이 되지 않으려면 임기 마지막까지 여당에 대한 '그립'을 강하게 쥐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정적(政敵)에 대한 공천 학살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친박계의 수장은 임기 말 자신이 공천한 국회의원들의 대오 이탈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됐다.

몇달 후면 차기 총선 여당 공천이 이뤄진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영향력을 행사해 여당을 재편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다. 때문에 본인이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것이라는 전망이 상식이다. '개국공신'(정권 창출 일등 공신)과 '순장조'(정권과 끝까지 함께 갈 인사)에 대한 배려도 얹어질 것이다.

반대로 이른바 '주군'을 배신했던 전력이 있는 사람, '정치는 대통령보다 내가 더 잘 안다'며 딴지를 걸 수 있는 인사, 대통령보다 국익이 먼저인 정치 신인은 낙점을 받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공천=당선' 분위기가 완연한 대구경북 여당 국회의원 공천이 어떻게 진행될지 가늠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