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32> 셰익스피어의 음악-햄릿의 피리

입력 2023-06-26 11:34:28 수정 2023-06-26 17:32:27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햄릿과 오펠리아. 서영처 교수 제공.
햄릿과 오펠리아. 서영처 교수 제공.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 시인.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 시인.

고대 그리스 비극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융성과 함께 이루어졌듯이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영국 르네상스의 융성과 함께 이루어졌다. 셰익스피어(1564-1616)가 활동하던 시기는 영국 르네상스 음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엘리자베스Ⅰ세는 자타가 인정하는 뛰어난 류트 주자였다. 그녀는 궁중 행사에 음악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자신의 의중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했다. 당대 최고의 극작가 셰익스피어 또한 음악적 함의를 통해 극의 방향과 뜻을 전달하며 청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니체는 예술의 본질을 질서와 청명성을 추구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도취와 격정을 지향하는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양자의 대립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켜나간다고 보았다. 아폴론적 이성을 대표하는 악기가 현악기 리라라면, 디오니소스 축전에 사용했던 격정적인 관악기는 아울로스이다. 두 악기는 서로 상반된 의미와 상징성을 드러낸다.

아폴론과 마르시아스의 이야기(마르시아스는 아테나 여신이 버린 아울로스를 주워 음악의 신 아폴론에게 도전장을 내고 경연에 진 대가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는다)에서 유래하듯이 피리는 오랫동안 현악기가 가지는 깊이와 비중에 미치지 못하는 악기로 취급되어 왔다. 또 마르시아스의 참혹한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아울로스는 죽음을 매개하며 이러한 상징성을 후대에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피리의 구멍은 오감이 집중되어 있는 감각기관처럼 의사소통 이상의 복잡한 내면의식을 표현한다. 이 구멍은 가능성과 고뇌의 장소이며 존재의 은밀한 방이며 각기 다른 비밀과 음모를 간직하고 있다. 피리는 목소리와 비슷한 음색을 내며 인간의 내면과 결부된 관념을 싣는다. 또한 신체에 밀착하는 굴촉성으로 관능적인 여운을 남긴다.

피리는 숨을 불어넣어 육체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악기다. 햄릿은 분별력을 잃고 "운명의 여신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피리"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파악한다. 그는 일이 돌출적이고 파행적으로 진행될 순간을 파열음에 빗대며 복수 계획의 전말과 실행 가능성의 최대치를 가늠한다. 햄릿은 피리에 내재된 소리가 광란의 가락이며 이러한 광폭하고 충동적인 실행을 통해 자신을 고뇌에서 전면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음을 암시한다.

피리는 분노 속에서 복수를 모색하고 있으나 실행에 돌입하지 못하고 지체하는 햄릿의 고뇌를 드러내며 악기의 육화된 이미지를 통해 극의 미학적 전환을 이루고자 한다. 피리는 무심코 등장하는 소품이 아니라 햄릿이 놓인 상황, 작품의 주제와 맥락을 전달하고 '햄릿'을 퇴폐나 허무가 아닌 창조적인 비극으로 승화시킨다.

피리에 관한 내용은 '햄릿'에서 한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이것은 추론하기 어려운 미답지에 대한 총체적 실체를 밝혀주는 중요한 알레고리가 되고 있다. 햄릿은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물이며 동시에 디오니소스적 징후를 지닌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인물이다. 예민한 감수성과 강렬한 고뇌는 예술을 낳는 충동으로 햄릿의 이러한 토대는 그의 삶과 복수를 더욱 비극적이고 미학적인 현상으로 이끌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