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전직 대통령의 품격

입력 2023-06-05 20:24:20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서명수 객원논설위원(슈퍼차이나연구소 대표)

퇴임한 전직 대통령들의 행보가 불편하다. 전직 대통령은 국가 원로로서 역할을 하고, 자신의 재임 시절 피치 못하게 겪었던 시행착오 등 실정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책임지는 게 상식이다. 그럼에도 전직 대통령들은 국정 책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전직 대통령 예우를 따박따박 받으면서 후임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정파 지도자처럼 행동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4월 말 '책방지기'를 자처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양산 사저 곁에 '평산책방'이 개점했다. 시골 마을에 10억여 원을 들여서 빈집을 구입, 동네 책방을 만든다는 발상이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한 달(4월 26일∼5월 25일) 만에 2만2천691권의 책을 판매했다는 기록이 더 충격적이다. 책 판매 수익만 무려 1억5천여만 원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팬 미팅'에 불과한 동네 책방을 만들어 수익을 극대화하면서 어떤 공익 재단으로 운영할 것인지 홈페이지에 드러낸 것이 없다. 누가 책방 수익을 밝히라고 한 적도 없는데 굳이 공개하고 나선 것은 더 많은 지지자들이 와서 책을 사라는 무언의 암시인가?

책방지기 문재인의 모습은 부동산 정책과 소득주도성장 등 나열하기도 힘든 지난 정부 실정에는 눈감고,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으로 있다가 총선 차출론이 압박하자 네팔 트레킹으로 도망친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전직 대통령의 '책방지기' 자처를 탓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국정 운영 경험을 국가와 사회를 위해 환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 원로 신분을 망각하고, 한 정파의 '상왕'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책방 개점과 '문재인입니다'라는 자화자찬 영화 개봉이 퇴임 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근 청계천을 찾는 등 외부 나들이에 나서는 것도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특사로 풀려난 그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비리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직 대통령의 처지를 망각한 오버 페이스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대구 동화사를 방문하는 등 외부 활동 재개에 나선 것도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지난해 대구에 정착한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집사 역할을 해 온 유영하 변호사를 대구시장 후보로 추천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직접 영상을 찍어 유 변호사 지지를 호소한 그녀의 행동은 그동안의 연민마저도 단번에 날려 버렸다. 이번 동화사행에도 유 변호사의 모습이 보였다. 내년 총선에서 유 변호사와 최경환 전 부총리,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소위 '친박 인사'들의 출마가 가시화되면 박 전 대통령이 후견인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횡행한다.

"여러분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다. 권력을 향한 전쟁이다. 우리는 신중하고 분별력 있고 조신스럽고 온건하고 나약한 가짜 리더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는 난타전에 뛰어들 인물이다. 정치 지도자의 목표는 과반을 차지하는 것이다."

정치를 타협이 아닌 '전쟁'으로 인식한 깅리치 전 미 하원의장의 말처럼 우리 정치도 문재인 정부를 거치면서 타협과 양보 없는, 편 가르기를 통한 '과반 확보 전쟁'으로 변질됐다. 편을 가르고 상대를 증오하는 선동 정치를 통해 '공정'과 '정의'와 '평등'은 정치 구호로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중 실정에 대해 깊이 반성하면서 국가 원로의 역할과 품격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