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때 6·25참전 정성진 씨 "73년째 이름 없는 용사입니다"

입력 2023-06-06 16:27:58 수정 2023-06-06 20:49:10

총 쏘는 법만 배우고 전투 투입…군번 없으니 보훈가족도 제외
보상이 아닌 명예 되찾고 싶어

정성진 씨가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마경대 기자
정성진 씨가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마경대 기자

1950년 6·25전쟁 당시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정성진(88·영주시 휴천동) 씨는 군번도, 소속부대도 없는 무명용사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7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국가유공자나 보훈가족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정 씨는 "6·25 전쟁이 나고 한 달 뒤쯤(1950년 7월 중순쯤) 영주에서 피난길에 오른 가족들과 함께 영천역 앞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군인들이 군용 트럭 4대를 타고 나타나 '나라가 위급하니 젊은 사람들은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며 "당시에는 먹을 것이 없어 배가 너무 고팠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는 마음으로 지원했다. 당시 함께 군에 지원한 17~21세 청년들은 모두 70~80명에 이른다"고 회고했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는 "가족들이 말렸지만 군용 트럭을 타고 영천 신녕으로 갔다. 다음날 아침에 총 쏘는 법만 가르쳐주고 별다른 훈련도 없이 전투에 투입됐다. 같이 지원한 청년들은 모두 분대별로 쪼개졌고 나는 수색중대에 소속돼 전투(신녕전투)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민군들의 폭탄이 쏟아지면서 소대장은 팔이 떨어져 나가는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위생병이 없어 치료도 받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또 "폭탄이 비 오듯 쏟아져 감당이 안될 정도였다. 전우들의 시체가 지천에 나 뒹구는 등 참혹했다. 더 이상 고지를 지킬 수 없어 부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기 시작했고 남하하는 중에 81㎜무반동총을 메고 있던 육군 8사단 소속 소령과 병사 4명을 만나 함께 휩쓸려 후퇴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영천 화산역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만난 영주 동부초등학교 5회 졸업생인 고향 선배 우병화(당시 CID소속) 씨가 8사단 병사들을 따라가지 말고 '대구로 가라'고 해 목숨을 건졌다. 당시에 전투에 참가한 무명용사 대부분은 숨졌다 "고 했다.

당시 전투에서 구사일생했지만 정 씨는 전쟁이 끝난 지 73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가유공자나 보훈가족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전투에 참여한 것은 고작 10여 일이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 당시 상황을 전한다"며 "군번도 없고 근거도 없는 무명용사지만 국가에서 인정해 주는데 소홀한 것 같아 화가 난다"고 했다.

그동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았다는 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각종 유공자를 선정하는 모습을 보고 보훈처에 연락해 봤다. 보증인을 2명 세우라는데 다 죽고 없었다. 보상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명예를 되찾고 싶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끝난 후 23세 되던 해에 군(11사단)에 입대해 36개월간 군 복무도 마쳤다"는 정성진 씨는 "군 복무시절 동료 병사들한테 전쟁 담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