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인화의 온고지신] 부활하는 초혁신국가

입력 2023-06-01 13:30:00 수정 2023-06-01 17:29:52

선각단화쌍조문금박
선각단화쌍조문금박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경주 동궁과 월지는 과거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렸다. 폐허에 기러기와 오리만 가득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75년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되어 약 3만여 점의 신라 유물이 발견되었다.

2016년 동궁과 월지 '나'지구를 조사하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돌돌 말려 1밀리미터 두께의 코딱지처럼 보이는 금박 뭉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얼마 후 20미터 떨어진 곳에서 금박 뭉치의 다른 조각을 발견한다. 둘을 이어 붙여 현미경으로 관찰하자 인간의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놀라운 유물이 드러났다.

가로 3.6㎝, 세로 1.17㎝ 어른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크기에 별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상상의 꽃 '단화'가 사방에 흐드러지게 핀 가운데 멧비둘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다. 꽃과 비둘기 모두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놀랍게도 이 그림은 A4 용지보다 얇은 0.04mm 두께의 금박에 머리카락보다 훨씬 더 가는 0.05mm의 세선으로 새겨져 있다. 이것이 현대의 조각술로는 재현하기 어렵다는 '선각단화쌍조문금박'이다.

최근 고고학의 놀라울 만한 발전은 신라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오랫동안 경주는 폐도(廢都), 즉 패망하여 폐허가 된 옛 왕조의 수도였다.

경주 출신의 소설가 김동리는 "나는 폐도에서 태어났다. 나는 얼음장같이 차디찬 폐허를 밟고 무덤 속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자라났다."라고 말했다. 영천 출신의 대학자 정몽주는 <첨성대>라는 시에서 "문물은 이미 신라와 함께 다하였건만 / 슬프다 산과 물은 고금과 같구나" 하고 한탄했다.

이처럼 경주는 '영화의 천년, 폐허의 천년'으로 현대인들에게 현세의 덧없음을 말해주는 애상과 페이소스의 원천이었다. 그 폐허에 간직된 한국 고대의 넓고 깊은 문화적 힘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모종의 수수께끼였다.

그러나 지하를 레이저로 투시하고, 흙덩어리 속의 꽃가루를 분석해 식생을 복원하면서 현대 과학은 경주를 새롭게 발견했다. 일본과 중국의 조선 기술로는 만들지 못했던 원양 항해 능력을 가진 '신라선', 당나라 황제 대종이 하늘이 만든 것이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고 감탄했던 정밀공예품 '만불산', 1300년을 견디는 세계 최고의 내구성을 가진 종이 '계림지', 최고급 양탄자로 일본에 수출되었던 '신라모전' …… 과학기술강국 신라의 빛과 영광은 끝이 없다.

그것은 높은 자존감과 강한 포용력으로 이슬람과 서구, 동아시아, 인도까지를 끌어안았던 초국적 국가였다. 철저한 상호존중에 입각한 쌍방향 교류로 자유, 창의, 공생을 실천했던 혁신적 포용의 문화대국이었다. 바로 오늘날의 한국이 나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였다.

신라는 본래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한반도 동남쪽에 치우쳐 있던 가난하고 낙후된 고대국가였다. 6세기까지 고구려, 백제, 대가야, 왜, 말갈의 5각 포위망에 갇힌는 변방의 약소국으로 살았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5세기 심약의 <송서>에도, 6세기 소자현의 <남제서>에도 신라가 나오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고구려, 백제, 가야는 알았지만 신라는 알지 못했다.

언제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약소국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누구와도 제휴할 수 있다는 초국적주의(Trans-nationalism)를 견지했다. 그리하여 신라의 관직은 석탈해, 묵호, 혜량 등의 사례처럼 통일 전부터 외국인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화랑세기>는 진위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신라에서 벌어졌을 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으로 군주에게 봉사한다는 색공지신(色供之臣), 본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실력자와 동침한 뒤에 낳은 마복자(磨腹子) 개념, 동시에 세 명의 남자와 실질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삼서제(三壻制)는 참으로 독특한 사회현상이다. 이것은 서로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제휴 세력들이 공존의 진통을 겪으면서 사회적 통합을 위해 몸부림친 증거로 추정된다.

신라는 가능한 모든 세력들을 포용하면서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내었다. 훗날 경문왕이 된 김응렴이 화랑 시절에 설파한 겸손, 검소, 관용의 삼선행(三善行), 원광법사가 가르친 화랑의 규율 세속오계, <신당서> 동이전에 나오는 신라의 토론 문화 화백 제도 등이 그것이었다.

신라인들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자발적인 참여의 '사회'를 건설했다. 다양한 파트너십과 협업으로 계층, 즉 골품제를 뛰어넘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를 도모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보호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공존하는 평화에 기반한 안전하고 번영하는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은 코로나 위기와 함께 온난화로 인한 이상 기후가 일상화되어 산불, 홍수, 가뭄, 태풍이 그치지 않는 지구 규모의 위기 시대다. 미중 패권 경쟁과 탈세계화 분쟁이 격화되어 전쟁이 발발하고 국제 무역 질서가 악화되는 혼돈의 시기이기도 하다. 모든 나라에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 "코로나 이후 2년간 30시간마다 1명씩 억만장자가 생겨나고 33시간마다 100만 명씩 극빈층이 늘고 있는"(2022년 국제 엠네스티 보고서) 분열의 시기이다.

이 고난의 시기에 1300년 전의 초혁신국가는 인류가 배워야 할 미래의 시금석이 된다. 경북연구원은 문화재청의 경쟁입찰에 선정되어 3년간 270억 예산의 '서라벌 천년 시간여행' 사업을 주관하게 되었다. 위대한 초국적 초혁신국가가 부활하는 대역사의 첫걸음이다. 겸손 검소 관용을 통해 생명을 보호하고, 자기 관리와 수련을 통해 생명을 강화하고 토론과 합의를 통해 생명을 연결했던 신라의 지혜를 21세기가 공유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인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