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랑] 가난과 이혼이 남긴 좁은 집…첫째는 떠나고 둘째 꿈은 들어줄 수 없어

입력 2023-05-23 06:30:00 수정 2023-06-23 17:24:16

게임중독 남편, 게임서 만난 여자와 바람… 홀로 두 아이 키워
모자보호시설·월셋방 전전…생활고로 빚 6천만원 힘겹게 상환 중
딸은 '턱관절내장증' 앓아…엄마도 고질적인 이석증 호소

지난 19일 저녁 윤미소(가명·40) 씨의 딸 한초희(가명·15) 양이 휴대폰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윤정훈 기자
지난 19일 저녁 윤미소(가명·40) 씨의 딸 한초희(가명·15) 양이 휴대폰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윤정훈 기자

가난은 가장 먼저 포기를 가르친다. 거듭된 포기는 상처를 남기고, 욕망 자체를 외면하게 만든다.

금요일 저녁, 오늘도 어지럼증이 심해 침대에 누워 있는 윤미소(가명·40) 씨. 침대 옆 책상에선 미소 씨의 딸 한초희(가명·15) 양이 몇 시간 뒤면 올라올 토요일 웹툰을 기다리며 휴대폰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손가락 끝으로 그렸지만 제법 잘 그린 그림이다. 좋은 환경이 갖춰졌다면, 딸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초희야, 왜 요즘은 태블릿 사달라고 말 안 해?"

"그냥…."

반색하며 떼라도 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무덤덤한 초희의 모습 위로 가난 때문에 언니는 미술을, 자신은 음악을 포기했던 어린 시절이 겹쳐졌다. 딸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마음 아팠지만 정작 딸이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걸 가장 잘 알기에 미소 씨는 하고픈 말을 포기했다.

◆첫 애 출산 당일에도 피시방 간 게임중독 남편… 모자시설 등 전전하며 힘겹게 생활

미소 씨의 언니는 국내 최초의 알레르기성 자반증 발병자였다. 지금이야 별거 아닌 병이지만, 미소 씨가 고작 13살이었던 그 당시만 해도 약이 없었다. 약값, 4개월간의 입원 치료비 등으로 막대한 부담이 발생했다. 시장에서 작은 옷 가게를 했던 부모님은 집까지 팔아 돈을 마련했다. 다행히 언니는 다시 건강해졌지만, 같은 해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가세가 기울었다. 집 앞 우동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소 씨.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후 백화점 여성복매장에서 판매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22살에 같은 백화점 직장 동료로부터 한 남자를 소개받았다. 첫 만남 당시 소개팅 상대는 어색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 미소 씨는 그 친구에게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미소 씨는 그 친구와 2년 정도 연애 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키 크고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다. 남편은 직장도 안 구하고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가끔 일하며 번 돈은 게임에 다 쏟아부었다. 일하러 간다면서 새벽 6시에 피시방에 가서 자정쯤 돌아오곤 했다. 첫째 현성(가명·17)이를 출산한 날에도 남편은 병원엔 잠시만 들렀다가 곧바로 피시방에 갔다. 그날 미소 씨는 병원 침대에 누워 많이 울었다.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 하고, 친정 식구들에게 현성이를 맡기고 백화점 옷 매장을 이곳저곳 다니며 남편 대신 돈을 벌러 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남편은 게임에서 만난 여자와 바람까지 피웠다. 둘째 초희를 임신했을 때였다. 들켜 놓고 오히려 뻔뻔하게 나오는 남편을 보자 피가 차게 식었다.

미소 씨는 26살에 남편과 이혼했다. 이혼 후 당장 갈만한 곳이 없어 지역 모자보호시설에서 지내야만 했다. 최대 5년밖에 살 수 없기 때문에 시설을 나온 뒤엔 월세방을 전전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 보험 판매, 제품 영업, 사무보조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복지 지원은 미미했다. 당시 한부모가정으로서 받는 한 달 지원금은 아이 한 명당 5만원에 불과했다.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고 싶어도 여전히 아이의 부양의무자로 인정되는 전 남편의 수입이 잡힌다는 이유로 선정되지 못했다. 양육비도 보내주지 않는 전 남편의 존재가 끝까지 미소 씨의 발목을 잡았다.

◆13평짜리 좁은 집, 아들은 어쩔 수 없이 기숙사 학교로… 딸은 턱관절내장증

법이 바뀐 뒤에야 지난해 12월부터 수급자로 선정됐지만, 그간 생활고로 생겨난 6천만원의 빚은 고스란히 미소 씨에게 남았다. 정부보조금으로 매달 나오는 140만원은 부채상환비로 빠져나가고 있다. 미소 씨는 금전적으로도, 아이들 양육에 있어서도 친정 식구들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다. 현재 거주하는 13평짜리 빌라도 친언니의 배려로 살게 된 곳이었다. 이웃 주민과 소음 문제로 다퉈 원래 살던 빌라에서 급하게 나온 미소 씨는 지난해 1월부터 친언니가 살던 집에 보증금 없이 월세만 10만원씩 내며 살고 있다.

간신히 얻은 보금자리지만 세 식구가 살 순 없는 집이었다. 거실도 없이 작은 방 2개에 주방과 화장실이 전부인 집 구조상 아들과 딸이 분리된 공간에서 지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LH 매입임대주택도 알아봤으나 보증금이 없어 포기했다. 어쩔 수 없이 현성이는 이사오면서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할머니집에서 지내야 했다. 현성이는 더 이상 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생각에 고등학교는 일부러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는 특성화고를 골랐다. 오빠와 떨어져 지내는 생활이 어느새 초희에겐 더 익숙해졌다.

두 아이에겐 늘 미안했던 미소 씨는 아이들을 건강하게라도 키우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최근 초희의 턱에 문제가 생겼다. 지난 1월부터 초희는 입을 벌릴 때마다 통증을 느꼈다. 턱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했다. '턱관절내장증'이었다. 턱관절 내부에 있는 관절원판이 원래 위치에서 벗어나거나 약해져 나타나는 병으로, 증상이 심해지면 관절염, 안면 비대칭, 부정교합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한다. 초희는 우선 관절에 강한 힘이 덜 가해지도록 관절보호장치를 착용하고 있다. 장치 비용은 보험 적용이 안 된다. 장기적으로 치료를 진행해야 해 현재는 보호장치를 끼며 경과를 지켜보고 있는 단계다. 치료에 진전이 없으면 다른 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어 비용이 얼마나 더 들지 알 수 없다.

두 아이의 유일한 버팀목인 미소 씨의 건강도 좋지만은 못한 상황이다. 고질적인 이석증으로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럽거나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일이 잦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이 한 방향으로 돌기도 했다. 이석증으로 지난 2014년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이 정도 상태면 구급차에 실려 왔어야 하는데 혼자 온 것이 대단하다며 놀라워 했다.

웹툰작가를 꿈꾸는 초희가 오늘도 휴대폰 화면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작은 손가락을 바삐 움직이며 캐릭터가 입은 옷을 보라색으로 덧칠하는 초희. 웹툰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할까. 그새 포기한 건 아닐까. 돌아올 대답이 두려워 묻고픈 말을 집어삼키는 미소 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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