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칼럼] 12년 만의 국빈 방미와 12년 만의 셔틀 외교

입력 2023-05-07 19:54:18 수정 2023-05-08 06:21:59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이상헌 뉴스국 부국장

1972년 9월 25일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와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베이징에서 만났다. 하지만 미리 해둔 기본적 합의에도 양국은 국교 정상화를 확신할 순 없었다. 중국의 핵심 요구였던 대만과의 단교에 대해 일본이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영향이 컸다.

에즈라 보걸 전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중국과 일본'에서 다나카 총리의 첫날 만찬 발언도 문제가 됐다고 짚었다. "전쟁 중 일본이 많은 폐를 끼쳤다"는 말이 중국어 '마판'(麻煩)으로 번역된 탓이었다. 이 단어는 '귀찮게 해서,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는 뜻이다.

경악한 저우 총리는 즉각 "다나카 총리의 사과는 일본이 일으킨 막대한 고통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틀째 회담에는 아예 지펑페이 외교부장을 대신 내세웠다. 마오쩌둥 주석 역시 "마판은 지나치게 격식 없는 말"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과 중국의 국민 정서를 감안하면 이처럼 일본 지도자의 한마디는 매우 큰 파장을 낳는다. 7일 한일 서울 정상회담에서도 초미의 관심은 일본의 과거사 관련 표현 여부였다. 앞서 3월 도쿄 회담에선 반성과 사죄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이날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신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표현도 되풀이했다. 사죄와 반성은 이번에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이 단지 '힘들고 슬픈 경험'이라고? 여기에 동의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역대 내각 입장을 계승한다는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기시다 총리의 수사(修辭)는 "더 이상 사과는 기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사실 12년 만의 셔틀 외교를 앞두고 국내에선 일본의 변화를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은 '한일 관계 개선을 주도한 윤석열 대통령의 용기 있는 결단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마음으로 답방을 결심했다'는 기시다 총리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후세 다쓰지 씨를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만 포함된 것은 이례적이다.

돌이켜보면 한국과 일본이 올해 들어 급박하게 움직인 것은 결국 미국의 압박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강제 동원 배상 문제에 대한 해법 발표, 도쿄 회담, 국빈 방미에 이은 예상보다 빠른 셔틀 외교 복원이 모두 미국산 시나리오였을 가능성이 높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회담 소식을 전하며 "한일 정상이 두 달 만에 두 번째 만난 것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승리"라고 진단했다.

올해 3·1절 기념사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될 것"이라고 했던 윤 정부의 역사 인식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일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답방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풀 수도 없다. 하지만 국민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담대한 외교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중국과 일본은 우여곡절 끝에 국교 정상화 협정에 서명하고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훗날 덩샤오핑 주석은 일본 방문에서 다나카 총리에게 "물을 마실 때는 우물을 판 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며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속하게 신뢰를 구축하고 친구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비현실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