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
나이가 들었다고 추억에 살지 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소개하고 싶다. 바로 도서관 추억이다. 도서관이 나오는 영화가 많지만 나에게 추억으로 남은 도서관은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이 맺어지는 도서관이다. 다른 영화에 나오는 화려한 도서관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고, 게다가 혁명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시골 마을 유리아틴의 도서관이다. 영화에는 지바고가 라라가 사는 그 시골을 처음 찾아갔을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나는 것으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지바고가 그곳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책을 읽다가 그곳에 온 라라를 만났다고 하고, 지바고가 읽은 책들의 이름까지 상세하게 열거하는데, 오래되고 전문적인 자료들이다. 심지어 좌석이 100개나 되고 언제나 만원이었다고도 하는데 영화에는 그런 점이 묘사되지 않아 유감이다.
지바고와 라라가 도서관에서 만나기 훨씬 전인 19세기 말,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던 죄수가 멀리 떨어진 도서관에서 영독불 문헌을 수십 종 우편으로 빌려 책을 쓰고 유형 마지막 해에 출판했다. 반면 내가 근무한 대학 도서관에 없는 책을 다른 도서관에서 우편으로 빌리는 제도를 이용하게 된 것은 21세기에 들어와서고, 그런 제도가 지금 우리 교도소에서도 인정되는지, 그리고 교도소에서 그렇게 책을 쓸 수 있고 재소 중에 출판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러시아를 몇 번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 깊은 추억은 그곳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책을 읽는다는 점이었다. 국민의 반이 취미로 독서를 꼽는 러시아의 독서열은 19세기에 시작된 도서관 건설 붐에서 비롯되었다. 1862년에 세워진 러시아 국가도서관은 미국 의회도서관보다 장서 수는 적지만 이용객 수는 세계 최고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 NOP는 2005년 러시아인의 독서 시간이 일주일에 7.1시간으로 세계 7위라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는 공산주의 붕괴 전의 1주 12시간의 반토막이어서 대통령 부인이 독서운동가로 나서서 'TV를 끄고 책을 들자'는 운동을 벌였다. 당시 한국인의 독서 시간은 1주에 3.1시간으로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더 짧아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러시아든 어디든 도서관을 찾을 때마다 감동하는 점은 학생들보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개관 시간보다 한두 시간 정도나 일찍 와서 긴 줄을 만들었다가 입장한 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책들을 쌓아 놓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읽는 광경이다. 가령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재일교포는 퇴직 후 매일처럼 도서관에 다니면서 19세기 말엽 일본에서 벌어진 조선인 관련 사건사고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만든 수백 권의 스크랩북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도 도서관이 많이 생긴 것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장서 수는 적고 이용객은 수험 준비자들이 대부분이다. 도서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하며 수험용 책들을 읽는(암기하는) 곳일 뿐이다. 대학도서관도 마찬가지다. 책이 없는 열람실이라는 곳은 평소 각종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이들로 복작거리고, 책이 있는 자료실은 시험 기간 외에는 텅텅 비어 있다. 그러니 도서관이 있어도 수험용 교과서 외의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수험용 교과서 외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도록, 아니 읽지 말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유리아틴 도서관에서 지바고가 읽은 책은 농지 통계, 지방 민속 자료, 푸가초프 관련 책들이다. 시인이자 의사인 그가 왜 그런 책을 읽었을까? 소설에 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데, 당시 지식인이나 교양인에게는 당연한 독서로 여겨졌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코로나 때문에 외국엘 가지 못해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곳 도서관의 열기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도시락을 싸들고 개관 한두 시간 전에 자전거를 타고 와서 문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하며 어제 읽은 책들에 대해 담소하는 노인들의 상기된 얼굴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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