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칼럼] 양심불량한 비서

입력 2023-05-04 11:14:42 수정 2023-05-04 18:29:25

심윤경 소설가

심윤경 소설가
심윤경 소설가

'챗GPT'라는 것이 처음으로 나타나 세계를 강타했을 때 나는 마침 새 소설을 쓰고 있던 중이었다. 챗GPT가 훌륭한 시나 소설, 에세이를 쉽게 써 낸다는 경험담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심 심란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인공지능에 의해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역이 예술이라니, 이럴 줄이야! 지금이라도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 하는 것인가? AI(인공지능)의 학습 기능이란 것이 워낙 놀랍다 보니 1년 뒤도 장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초기 기술이니까 아직은 내가 낫겠지 생각하고 일단 하던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AI를 경쟁자가 아닌 비서로 여겨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은 내 몫으로 하고, 소설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한 자료 조사 작업을 AI에게 맡기면 괜찮은 협업이 될 것 같았다. AI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럭셔리 요트에 대해 알려 줘. 고급 요트 브랜드는 뭐가 있지? 그 내부 인테리어는 어떻게 생겼어? 듣기 좋게 묘사해 봐."

묻자마자 AI 비서는 거침없는 답변을 술술 쏟아 냈지만 럭셔리 요트 브랜드에 대한 긴 보고서의 약 80%는 동어반복이었다. "Azimut Yachts-이탈리아에서 만든 럭셔리 요트 브랜드로, 1969년에 창립되었습니다. 다양한 크기와 스타일의 요트를 제공하며, 최신 기술과 디자인을 적용합니다"라는 대답에서 브랜드와 연도만 바뀐 것이 열 개쯤 생성되었다. 인테리어에 대해서도, 수준 높은 구매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수준 높은 공예와 기술력, 이태리 대리석과 고급 목재 등 고급 자재를 사용했고 침실, 주방, 영화관, 수영장, 휴식 공간 등을 갖추었으며 안전에도 신경 썼다는 식이었는데,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 답변이었다. 그런 대답을 듣고 있자니 성실한 조사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이것저것 갖다 붙여 아는 척만 하는 양아치 비서의 '썰 풀기'를 듣는 것 같은 격렬한 열받음을 느꼈다.

내 친구는 AI에게 의학 전문 지식을 물었는데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놀랍도록 화려하고 새로운 학설과 논문 리스트를 얻어 들고 횡재한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AI가 제공한 논문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그는 의문과 혼란에 빠졌다. AI가 소개한 논문을 실제 저널에서 찾을 수 없었고 저자 이름도 모두 낯설었다.

"나는 이런 논문을 찾을 수 없는데? A라는 사람이 이런 학설을 주장한 게 확실해?"

AI는 자기 대답이 확실하다, 보충하는 자료도 있다고 몇 번이나 장담하다가 갑자기 논문에 의거한 전문 지식을 논하는 것은 자신에게 허락된 경계를 벗어나는 일이라서 더 이상 대답할 수 없다고 태세를 전환하더니 서둘러 대화를 종결해 버렸다. 친구는 AI가 불러 주었던 화려한 논문 리스트가 모두 거짓이었음을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AI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저널에 가상의 학자가 기고한 가상의 논문 제목을 줄줄 불러 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AI의 속성을 눈치채고 있다. 챗GPT에서 G는 generative,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생각해서' 답변을 '만들어 낸다'. 이미 정해진 답을 반복하는 이전 AI보다 진보된 모델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이 '만들어 낸' 대답에 대한 양심이나 성찰이 없는 존재다. 그의 이런 양심 불량한 측면을 지적하고 조롱하는 수많은 검토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그에게 "세종대왕이 안중근 의사를 암살한 이유는?"이라고 묻는다면, 그는 거침없는 대답을 생성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안중근의 총명함과 용맹함을 믿고 그를 중용하였으나 차츰 그가 대북 문제(대북 문제라면 여진족? 북한?)에 강경 노선을 주장하여 왕명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결국 자객을 보내어 그를 암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이 대답을 받아 들고 나는 이 자가 광대무변한 지식을 갖추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지식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이라면 그 지식의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합당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한편으로, 인간이 AI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무거운 질문에 뜻밖에 쉬운 대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양심과 성찰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하는 말을 돌아보고,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현재 인류가 가진 최첨단 AI보다 나은 존재라고, 산뜻하게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