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봄이 오면 가겠다고 한 약속

입력 2023-04-14 10:24:42 수정 2023-04-17 13:05:27

박경혜 수필가

박경혜 수필가
박경혜 수필가

봄에 한 번 찾아뵙겠다고 한 약속이 있다. 얼었던 계곡물이 녹아 마른 바위를 적실 때쯤 노란 프리지아 한 아름 안고 봄바람처럼 살랑살랑 걸어가 그 댁 문을 두드리려 했다. 화들짝, 환하게 놀라는 그녀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불쑥 내밀고 커피 향 좋은 카페에서 진한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다.

커피값 실랑이를 하겠지만, 못 이기는 척 얻어 마시는 커피 맛은 좋을 터이다. 봄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밀린 숙제하듯 그리움을 풀어놓으리. 나란히 앉아 창밖으로 같은 풍경을 오래 보다가, 사소한 농담에도 마주 보며 웃다가 노을 무렵에나 그림자 길게 앞세우며 아쉽게 헤어질 것이다. 긴 이별은 말고 짧은 인사면 족하겠다. 그냥 '안녕히…'라고만.

마음이 굼떠서 찾아가지 못하고 서가에 나란히 꽂힌 그녀의 시집 중 한 권을 뽑는다. 책을 펼치자 주인을 닮은 시어들은 여전히 뜨겁다. 열병을 앓는 문장들이 몸을 뒤튼다. 시를 읽는다는 건 어쩌면 그를 훔쳐보는 일, 흠모하는 마음, 다가가는 방식이 아닐는지.

시는 서늘하지만, 언어는 따뜻한 분이다. 펜 끝은 날카롭지만,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늘 칼날을 자신에게 겨누기 때문이다. 스스로 불의하고 부족한 사람이라 낮추어 말하지만 내 경험에 비추어 실로 그런 사람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가장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까닭이다.

지난 겨울이 유난히 혹독했던 탓일까. 집 앞 어린 벚나무가 피워낸 꽃송이가 예년보다 자잘하다. 추위를 견디느라 옹송그렸을 나무의 시간을 더듬다 엉성한 꽃그늘 아래 의자를 놓고 앉아 시를 읽는다. 여백이 많은 시는 난해하지만, 행간은 독자의 몫이니 오래 서성일 수밖에. 예전에 줄 그었던 문장들이 자꾸 발목을 잡아 이 봄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리라 예감하면서.

절정이 지고 있다. 순한 바람에도 꽃잎이 화르르 흩날린다. 의무를 마치고 마침내 홀가분해진 몸의 언어들이 가볍다. 끝내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툭 터져버린 울음처럼 하염없다. 모든 절정은 저리도 시리게 아름답고 슬픈 표정으로 지는 것일까.

햇살이 눈 부시다. 마음이 어수선하니 시어들이 튀밥처럼 낱알로 튀어 나간다. 집중되지 않는 시집을 덮어 책 위로 떨어진 꽃잎 몇 장을 가둔다. 금방 읽었던 시가 지키지 못한 약속처럼 입안에 까슬하게 남는다.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 꽃이 가장 꽃다운지 /헤아리다가 /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 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후략·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시가 내 마음을 대변한다. 기약 없다는 건 끝내 놓치고 말 여린 꽃잎 같은 것. 어느 날이 가장 좋은 봄날일지 망설이는 동안 봄은 자꾸 멀어져 간다. 당신들의 약속은 안녕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