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한국인 한(恨)의 정서 짙게 밴 진달래

입력 2023-04-14 16:30:00 수정 2023-04-14 17:10:33

대구 달성군 비슬산의 참꽃 군락.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한국 최고의 이별 미학으로 평가되어 온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꽃을 뿌려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산화공덕(散花功德)'과 슬프지만 슬픔을 나타내지 않는 유교적인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서를 나타냄으로써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한(恨)을 절제하며 참아 내는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진달래를 소재로 삼은 이유는 뭘까? 겨레의 삶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고통, 그리움과 아쉬움을 함께 해온 진달래에는 한국인의 정서와 얼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겨레의 꽃으로 대우

이홍렬이 일제강점기에 작곡한 유명 가곡 「바위고개」는 서정을 그린 연가가 아니라 조국의 비운을 담은 저항곡이다. 특히 2, 3절의 '바위고개'는 우리 강산을 의미하고 진달래는 우리나라요 겨레를 뜻한다.

바위고개 핀 꽃 진달래꽃은

우리 님이 즐겨 즐겨 꺾어 주던 꽃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바위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

옛 님이 그리워 하도 그리워

십여 년 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 납니다

'님은 가고 없어도 잘도 피었네' 가사는 '조국인 임이 없어도 우리민족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옛 님'과 '머슴살이'도 나라를 빼앗긴 처지의 비유다.

1956년 나라꽃에 대한 논의가 일었을 때 진달래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일부 인사에 의해 제시되었다. 시인 조동화는 한 신문에 진달래를 추천했다.

또 서울대 문리대 이민재(李敏載) 교수는 다른 일간지에 기고한 「국화 무궁화 재검토」라는 글을 통해 진달래를 국화로 강력하게 추천했다. 진달래가 국화로 적당한 근거로 ▷식물학적으로 우리 풍토에 제일 알맞고 ▷우리 민족 실생활 면이나 정서적인 면에서 옛날부터 3월 3일 '화전놀이' 즐겼고 ▷많은 시인들이 민족 정서에 촉매 역할을 했으며 ▷백두산에서 한라산에 이르는 전 국토에 걸쳐 분포하며 강산에서 아름다운 인상을 깊게 해준다는 점을 제시했다.

진달래

◆봄꽃의 대명사 참꽃

김동환의 「봄이 오면」과 「산 너머 남촌에는」, 이원수의 「고향의 봄」과 같은 시나 가수 이용복의 노래 「어린 시절」, 정훈희의 「꽃길」, 동요 「그 옛날에」 등 가사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꽃이 진달래다.

진달래꽃은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할 때 핀다. 우리나라 봄을 대표하는 꽃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달래는 뿌리가 얕아 약간 그늘지며 습기가 있는 곳을 좋아한다. 예전에 민둥산이었던 동네 야산은 물론 저 멀리 높은 산꼭대기까지 진분홍으로 수놓았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산림녹화에 성공하여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우리 산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은 직후에는 아주 헐벗고 황폐했다.

척박한 땅과 산성토양에 강한 진달래나무가 곳곳에 뿌리 내려 아이들은 어렵지 않게 산에서 진달래꽃을 손쉽게 따먹을 수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진달래가 필 때쯤이면 양식이 떨어지는 춘궁기에 접어든다. 굶주린 아이들은 약간 시큼털털하면서 들쩍지근한 진달래꽃을 따먹으며 허기를 조금이나마 달랬다.

'먹을 수 있는 진짜 꽃'이라는 의미로 참꽃이라고 자연스럽게 부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대구경북에서는 진달래보다 참꽃이란 이름이 더 친숙하다. 참꽃이 지고나면 '연달래'라고 부르는 산철쭉이 피는데 이는 먹지 못하기 때문에 '개꽃'이라고 불렀다.

진달래의 어원은 달래에 접두어 진(眞)이 붙은 형태로 짐작하고 있다. 달래나 산달래의 연한 보랏빛 꽃보다 더 진한 꽃이 핀다는 해석에서 어원을 찾는 견해도 있다.

진달래의 꽃이 먼저 피고 지면 잎이 나올 무렵 철쭉의 잎과 꽃이 함께 고개를 내민다.

산림이 점점 우거지면서 진달래는 비옥하고 좋은 땅을 경쟁 수목들에게 빼앗기고 생존의 터전을 산꼭대기로 옮아가 거친 자연 환경에도 군락을 이루며 살아간다. 대구 달성군 비슬산과 경북 경주국립공원 단석산 등의 정상부근의 진달래나무들이 그런 사례다.

◆대구 비슬산과 경주 단석산 군락

대구경북에 있는 산 정상에 진달래 군락지가 여러 곳 있지만 비슬산과 와룡산, 단석산은 상춘객들이 많이 몰린다. 대구 서구와 달성군의 상징 꽃도 진달래꽃이다.

비슬산 대견사 뒤쪽 정상 부근에는 온통 진달래로 뒤덮여 있다. 99만여㎡(30만여 평)의 넓은 산기슭에는 군데군데 푸른 소나무가 보일뿐 거대한 진홍빛 물결이 장관이다. 달성군에서 10여 년간 공을 들여 가꾼 덕분이다, 지난해 개화기에는 꽃봉오리가 얼어버리는 동해(凍害)가 없어 꽃이 만개했을 때 그야말로 주단을 깔아놓은 듯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4년 만에 다시 열리는 올해 비슬산 참꽃문화제는 15일 산신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볼거리가 풍성하다. 데크를 따라 꽃구경하다보면 한 나절이 훌쩍 지나간다.

대구 서구 와룡산의 진달래 군락도 볼거리다. 도심과 가까워서 비슬산에 참꽃이 만개하면 와룡산에는 철쭉이 만발한다. 고도가 비슬산보다 낮은 와룡산은 개화가 보름 이상 빠르다.
경주시 건천읍의 단석산 정상 비탈에도 진달래가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정상 바로 아래부터 수령 20년은 족히 넘는 3~4m 높이의 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올해는 특히 개화 시기가 앞당겨져서 진달래꽃 만개한 모습을 놓쳐 아쉬워하는 상춘객들이 적지 않다.

대구 서구 와룡산의 진달래 군락

◆진달래와 두견의 전설

마을 부녀자들은 음력 3월에 화전놀이라고 하여 경치 좋은 산이나 냇가를 찾아가 진달래꽃으로 화전병(花煎餠)을 부쳐 먹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3월 3일 편에는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둥근 전을 만들고 그것을 기름에 지진 것을 화전이라 한다는 내용과 함께 「화전」(花煎)이란 그의 시도 나온다.

옛 책에 나오는 진달래는 한문으로 두견(杜鵑)이라 기록돼 있는데, 이는 중국 전설에서 비롯됐다. 촉나라 망제(望帝) 두우는 위기에 빠진 신하 벌령을 구해주었더니, 벌령은 왕위를 빼앗고 국외로 쫓아낸다. 억울하고 원통함을 참을 수 없었던 두우는 죽어서 두견이 되어 촉나라를 돌아다니다 목에서 피를 토하며 울어댔는데 그 피가 떨어져 진달래꽃이 됐다. 두견의 울음소리가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발음으로 '돌아감만 못하다'는 뜻의 '부루구이(不如歸)'처럼 들려서 생긴 애달픈 전설이다.

흰진달래

진달래는 낙엽활엽관목으로 한국, 중국, 일본, 몽골, 우수리 등지에 분포한다. 산지의 양지쪽을 좋아하면서도 여름철 따가운 햇볕을 오래 받는 곳에서는 버티지 못한다. 높이 2~3m로 자라며, 꽃은 4월에 잎보다 먼저 피고 가지 끝 부분의 곁눈에 1~5개가 모여 달린다.

꽃의 지름은 3~5cm로 분홍색을 띠고 겉에 털이 있으며 가장자리가 5개로 갈라진다. 수술은 10개, 수술보다 긴 암술은 1개이다. 원통형의 열매는 길이가 2cm 정도 되는데, 10월에 짙은 갈색으로 익으며 다 익으면 다섯 갈래로 터진다. 진달래의 변종인 흰진달래꽃도 있으나 산에서는 만나기 힘들고, 수목원에서나 볼 수 있다.

만병초

◆만병초와 꼬리진달래

진달래속 식물 중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만 분포돼 있으면서 겨울에도 푸른 잎이 달려있는 상록수 만병초가 있다. 잎이 길고 가죽처럼 두텁고 표면에 진한 녹색으로 광택이 난다. 줄기가 한 자 깊이의 눈에 파묻혀 있어도 잎은 파랗게 유지한다.

울릉도 산꼭대기나 태백산, 설악산에서 발견된다고 전해진다. 여름에 흰색 꽃이 피는 게 대부분이지만 백두산에는 노란 꽃이 피는 노랑만병초가, 울릉도에는 붉은 꽃이 피는 홍만병초가 유명하다.

몇 해 전 초가을에 백두산을 여행했을 때 장백폭포가 보이는 전망대 아래로 하산하는 길에 만병초가 군락을 이루며 땅 바닥에 기듯이 낮게 자라고 있었다.

대구경북에서는 만병초를 구경하려면 봉화에 있는 백두대간수목원에 가면 된다. 수목원 내 숲 정원의 1만여㎡에 1,000그루의 만병초가 심겨있다. 꽃은 5월 중순에서 말까지 활짝 피어서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 최근 대구 수목원에도 만병초원을 조성했다.

진달래속의 또 다른 상록수 꼬리진달래도 빼놓을 수 없다. 꼬리진달래는 진달래처럼 널리 자라지 않아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하다.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의 대왕송을 보러 산을 가다보면 꼬리진달래 군락을 볼 수 있다.

한여름인 6~7월에 하얀색 작은 꽃이 앙증맞게 꽃대에 촘촘히 모여 핀다. 세계에서 한반도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 분포하며 국내에는 울진과 봉화, 문경의 높은 산지에만 자라는 희귀종이다. 요즘은 도심 꽃집에서 화분으로 키운 원예 품종을 볼 수 있다.

꼬리진달래

나무 틈새 뿌리 내려 위태롭고 잎이 쉽게 말라

石罅根危葉易乾(석하근위섭역건)

서리와 바람에 꺾이고 잘린 것으로 잘못 알았네

風霜偏覺見摧殘(풍상편각견최잔)

이미 들국화 가득 피어 가을의 풍요 자랑하나

已饒野菊誇秋艶(이요야국과추염)

바위의 소나무 겨울 추위 견딤을 응당 부러워 하리라

應羨巖松保歲寒(응선암송보세한)

부른 바닷가에 향기 품은 두견화 애석하니

可惜含芳臨碧海(가석함방림벽해)

누가 능히 붉은 난간으로 옮겨 심을 수 있을까

誰能移植到朱欄(수능이식도주난)

뭇 풀과 나무와는 특별한 품격이니

與凡草木還殊品(여범초목환수품)

다만 두려운 건 나무꾼이 한 번 봐주기나 할런지

只恐樵夫一例看(지공초부일례간)

통일신라시대 학자이자 문장가인 최치원의 「두견」(杜鵑)이라는 시(詩)다. 자신의 처지를 빗댄 진달래가 빼어난 품성을 지녔지만 나무꾼[樵夫]이 다른 나무와 똑같이 볼까 두렵다고 썼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골품제라는 신분의 벽 때문에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했다. 진달래는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아마도 그 이전부터 한반도의 봄을 알리는 꽃으로 사랑받아오지 않았나 싶다.

조선시대 원예서 『양화소록』의 「화목구품」에 보면 진달래꽃 가운데 백두견, 즉 흰 진달래가 5품, 붉은 진달래인 홍두견이 6품에 들어있다. 또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에는 두견을 6등에 포함시키고 「화목28우」에는 '때에 맞는 벗'이라는 뜻의 시우(時友)로 소개하고 '꽃은 흰 것이 더 운치 있다'고 덧붙였다.

4월에 소환되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기억 가운데 '4·19혁명' 있다. 서울 수유리에 있는 국립4·19민주묘지의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비석에 새겨진 진혼문(鎭魂文)에 접동새와 진달래가 핏빛으로 등장한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