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브론즈 흉상의 얼굴을 갈아냈을까…대구 출신 정득용 작가, 고향서 첫 개인전

입력 2023-03-28 14:21:06 수정 2023-04-02 17:32:16

20년 이상 이탈리아서 활발한 활동
브론즈 조각, 아날로그 판화작업 등 전시
4월 9일까지 갤러리 팔조

자신의 작품 옆에 선 정득용 작가. 이연정 기자
자신의 작품 옆에 선 정득용 작가. 이연정 기자
정득용, 만나면..(Contatto) F2301, 2023, Pigment on fabric, 49.5x65.5cm.
정득용, 만나면..(Contatto) F2301, 2023, Pigment on fabric, 49.5x65.5cm.

20년 이상 이탈리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대구 출신 정득용 작가가 갤러리 팔조(대구 수성구 용학로 145-3 2층)에서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다. 그가 고향에서 여는 첫 전시다.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두세겹의 천이 겹쳐져 있다.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통, 그릇, 화병과 같은 빈 용기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실루엣을 천에 판화로 찍어낸 뒤 중첩시키는 것. 알 듯 모를 듯,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들이 겹치고 겹쳐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비어있는 오브제를 가져와 형태를 겹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 작가는 그 사이의 우연성에 주목한다. 그는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우연치않게 발현되는 실루엣과 색을발견하는 것이 재미있다"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미지 사이의 빈 공간이다. 비어있음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득용, 흔적 16c(Trace 16c), 2019, Ceramic, 43(h)cm.
정득용, 흔적 16c(Trace 16c), 2019, Ceramic, 43(h)cm.

비우는 과정에서의 우연성은 그가 이전부터 작업해온 브론즈 조각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새로운 작업을 찾아 고민하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작업실에 놓여진 석고상을 샌딩머신으로 아무렇게나 갈았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가루를 보며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낀 그에게 표면 일부가 갈린 석고상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갈린 부분을 따라 생겨난 선과 면, 예상치 못한 구멍이 흥미로웠다. 우연한 발견이 이후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흉상이 갈린 표면은 때로는 사람의 옆모습, 때로는 또다른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샌딩머신을 조금 더 사용하느냐, 멈추느냐에 따라 그 실루엣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작가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무엇인가를 만들려고 노력할 때보다, 만들어진 조각의 형상을 지울 때 또는 공간의 실루엣을 다른 실루엣과 교합시켰을 때 나타나는 추상적인 형상, 흔적들이 작업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비움'이라는 동양적 철학과 고전적인 서양 흉상의 만남. 이는 동서양의 만남이자 정신적, 시각적 만남을 담고 있다는 뜻에서 전시 제목도 'contatto'(contact·만남)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작가는 드디어 대구에서 처음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게 됐다. 그는 "반갑고 설레는 한편, 좋은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마음이 조금 무겁기도 하다. 즐겁게 전시를 준비했으니 관람객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4월 9일까지 이어지며 월요일은 휴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