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공정규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학박사)
진료실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아동기 감정 양식'(Childhood Emotional Pattern)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아동기 감정 양식은 주로 0~6세의 초기 아동기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아동기 감정 양식은 무의식이며 본인이 깨닫기 전까지는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 자신의 마음,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지배한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그녀는 어렸을 때 가족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무시감'을 받으며 자랐다. 그녀의 집안 분위기는 온통 가부장(家父長)적인 남존여비(男尊女卑) 문화로 가득 차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남동생만 장남이자 아들이라고 우대해 주고 자신은 차별하는 집안 분위기였다. 밥을 먹을 때도 맛있는 반찬이나 고기는 모두 남동생 차지였다. 남동생은 안방에서 어른들과 먹고 그녀는 부엌에서 어머니와 먹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동기 감정 양식은 '아! 나는 항상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하는 '무시감'이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무시감'으로 점철된 이런 아동기 감정 양식은 '현재 생활 방식'(Current Life Style)에도 계속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그녀와 여고 동창 친구, 세 명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가 그중 두 명이 여중 동창이어서 전혀 그녀를 무시할 의도가 없는 가운데 잠깐 여중 동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는 '저 친구들이 나를 무시해서 자기들끼리만 얘기한다'는 생각에 불현듯 기분이 나빠진다. 아동기 감정 양식이 현재 생활 방식에도 스며들어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삶을 지배한다. 당연히 그녀의 대인관계는 왜곡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현재의 문제를 과거의 왜곡된 잣대로 보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아동기 감정 양식은 그만큼 무섭다. 왜곡된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꾸 반복된다. 현실은 과거의 상황과 다른데도 부정적인 아동기 감정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정적인 아동기 감정 양식이 정신의학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정신분석의 제창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우리가 겪은 6세 이전의 초기 아동기 경험에서 입은 정신적인 상처가 크면 후에 각종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불씨가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어릴 때의 경험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인 가족관계가 특히 중요하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냉대 속에서 자란 사람, 부모의 끊임없는 불화를 겪고 자란 사람, 부모의 이별·사별 등으로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가진 채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후에 성격적 문제, 각종 우울과 불안, 심지어는 정신병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외 없이 과거의 아동기 감정 양식에 얽매이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철학자 조오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역사의 교훈을 이해하지 않는 자는 그것을 되풀이할 운명에 놓인다"고 했다. 개인도 개인 역사가 주는 교훈을 이해하고, 아동기 감정 양식을 깨닫고 어린 시절의 경험이 주는 영향에 안주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면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개인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다.
사실 정신치료도 자신의 개인 역사에서 아동기 감정 양식을 깨닫게 하여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작업이다. 어른이 되었는데도 어렸을 때의 부정적인 아동기 감정 양식의 노예로 산다면, 정신불건강(精神不健康)이다. 과거의 잣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동기 감정 양식을 깨닫는 '개인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통해 새로운 현재와 미래를 보자. 당신 앞에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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