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25> 쇼팽의 자장가(Berceuse op.57)- 진실한 사랑의 서사

입력 2023-03-20 14:05:38 수정 2023-03-20 20:38:25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자장가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자장가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음악은 많다. 하지만 에로스보다 더 뜨겁고 깊은 음악의 서사는 자장가밖에 없을 것이다. 자장가는 아이를 재우는 노래다. 아기를 향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심정을 노래에 담아 부르는 것이 자장가다. 이 지극한 사랑을 부모에게 1/10만 해도 효자 효녀 소리 들을 거라고 한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과도한 일과 복잡한 인생사에 지쳐 있다가도 잠을 푹 자고 나면 세상이 두루 편해지고 살만한 의욕이 생긴다. 성인들에게도 많은 부분 아이의 천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일까. 어머니가 흔들어주던 요람의 평화로움과 안정감을 소환하겠다는 듯 어느 유명 브랜드의 침대 회사가 불면증 환자를 위한 흔들어주는 침대를 출시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장가는 반복적이고 자연스러운 선율과 낮은 음역이 좋다. 허밍으로 부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인 노래로 아기를 깊은 잠의 바다에 빠뜨린다. 아이는 안정감을 느끼며 잠의 바다를 유영한다. 자장가를 들으며 정신적 일체감과 만족감을 느낀다. 어머니 또한 대지의 품과 같은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평온하면서도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요람은 양수와 환경이 비슷하다. 자장가의 반복적인 소리와 리듬은 몸에 각인된다. 아기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노래, 심장 박동, 호흡을 들으며 무의식중에 이것을 간직한다. 아기는 양수 속의 원초적인 고향을 떠올리며 일생일대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자장가는 태곳적 부유의 상태에 대한 기억이며 총체성과 완전성을 갖춘 지복의 세계에 다다르고자 하는 노래다. 태아가 양수 속을 유영하며 일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듯 아기들은 자장가를 들으며 궁극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느낀다.

쇼팽(1810-1849)의 자장가를 듣다 보면 이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서사가 있을까 싶다. 쇼팽의 음악은 기교적인 듯 기교적이지 않다. 지고한 사랑과 기쁨의 노래가 연주자의 손가락에서 한없이 빚어져 나온다. 물결을 따라 물결이, 햇살을 따라 햇살이, 한 줄기 바람을 따라 바람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의 앞날에 한없는 축복을 내려주는 것 같다. 쇼팽의 다른 피아노곡처럼 자장가 역시 서정적이지만 몰아치듯 격렬한 부분이 나타난다. 어떤 사랑의 노래도 이보다 더 응축된 진실을 들려주지는 못할 것이다.

서영처 계명대 교수
서영처 계명대 교수

쇼팽의 자장가는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사가 없는 기악곡이라 더 많은 상념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깊지만 무겁지 않은 왼손의 저음 화성과 오른손의 부드러운 화성적 멜로디, 세심한 트릴과 장식음들, 유연한 페달 기법은 고요하고 섬세한 노래를 만들어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도닥거려 준다.

위로가 필요할 때 쇼팽의 자장가를 듣는다. 자장가는 아이들만을 위한 음악이 아니다. 자장가는 한때 아이었던 어른들에게도 안정과 영속의 보금자리인 어머니의 품과 따뜻한 손길과 냄새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