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 장안대 총장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주기 추모식은 잿빛이었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 탓만은 아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등장한 희생자 유가족-팔공산 동화지구 상인-대구광역시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추모식을 팔공산 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강행했고, 동화지구 상인들은 그것을 어떡해서든 저지하려고 스피커의 출력을 올렸다. 무간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다. 한쪽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트로트를 틀고 있다. 그러는가 싶더니 양쪽에서 대구시의 무책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합창으로 터져나온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유가족, 팔공산 동화지구 상인, 대구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밑도 끝도 없는 갈등을 계속하고 있다. 이 상황의 고갱이는 다음과 같다.
희생자 유가족은 팔공산 시민안전테마파크가 추모공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안전테마파크를 이곳으로 유치할 때 지하철 참사를 내세우면서 정부 예산을 땄고, 지하철 참사 국민 성금 가운데 수십억 원을 시민안전테마파크 건립 비용으로 투입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대구시와 이곳을 추모공원으로 하려는 협의까지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화지구 상인들은 이런 추모공원 계획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상인들은 추모공원이 들어서면 그곳이 혐오감을 불러일으켜 지역 상가의 영업에 손실이 커지게 될 것이라고 걱정한다. 그리고 대구시가 상인들에게 추모공원이 이곳에 들어설 가능성은 없다고 확실하게 약속한 바가 있는데, 그것을 지키라고 한다.
대구시는 유구무언이다. 희생자 유가족과 동화지구 상인이 이렇게 서로 다른 기대를 하도록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시간이 가면 추모공원이 조성될 거라는 기대를, 동화지구 상인은 추모공원이 조성되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일이 꼬이게 된 것이다. 당시 대구시가 갈등 관리를 왜 이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문제를 쾌도난마로 해결할 방도는 없다는 사실이다. 희생자 유가족들의 간절한 추모의 뜻도, 동화지구 상인들이 느끼는 민생의 위협도, 이 사이에 끼어 있는 대구시의 난감한 처지도 다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실마리를 찾아 나가야 한다.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다행히 지난 수년 동안 희생자 유가족을 대표하는 2·18안전문화재단과 팔공산 동화지구 상인연합회, 대구시 안전실이 머리를 맞대고 상생 해결책을 찾아왔다. 3자가 함께 '상생 포럼'도 하였고, 대경연구원의 도움을 얻어 구체적 상생 방안을 설계하기도 했으며, 국민권익위 조정 테이블에 기대어 상생 타협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구시의회에 조례 개정 청원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정성들이 쌓여 최근 대구시와 동화지구 상인 사이에 3단계 이행 합의가 나왔다. 대구시가 이 지역에서 수행하는 세 가지 단계적 사업 추진에 따라 희생자 유가족이 희망하는 추모 사업을 동화지구 상인연합회가 단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단계적 이행 로드맵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보고 있노라니, 이제 겨우 여기까지 왔나 싶어 야속하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상생의 길을 찾아온 것이 대견하기도 하다. 슬픔을 삼키며 기다려 준 희생자 유가족들도 훌륭했고, 구체적 해법 찾기에 지혜를 내준 동화지구 상인들도 훌륭했다. 문제 해결에 나서 매듭을 만들어 준 대구시도 훌륭했다.
우리는 이러한 3자의 '선의'가 앞으로 잘 실현되기를 바라며 기다려야 한다. 유가족들은 더 인내해야 하고, 상인들은 더 양보해야 하며, 대구시는 더 책임져야 한다. 우리도 '선의'를 가지고 조용히 이를 성원해야 한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시기부터 사고 수습에 온갖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 해마다 추모식에 왔는데, 추도사조차 사양하면서 조용히 슬픔을 나누다 갔다. 둘 다 진정성을 느끼게 한 '추모'였다. 마음의 상처는 헤집어서 고치는 게 아니라 조용히 쓰다듬어 아물게 해야 한다. 이 말에 대구지하철 참사 추모, 상생의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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