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진노의 날(Dies Irae)

입력 2023-02-14 18:06:02 수정 2023-02-15 18:03:15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실크로드중앙아시아 연구원장)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실크로드중앙아시아 연구원장)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실크로드중앙아시아 연구원장)

베르디의 레퀴엠 가운데 '진노의 날'을 듣고 있으면 슬픔과 고통이 뒤범벅이 된다. 팬데믹의 공포가 채 가시기 전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더니, 지난 2월 6일 새벽에는 시리아 북쪽과 튀르키예 남서쪽으로부터 대지진 소식이 들려왔다. TV에서 전해주는 뉴스는 단테가 '신곡'에서 그려낸 지옥과 다르지 않다.

신께서는 우리가 재앙의 비극에서 잠시라도 비껴 있기를 원치 않으시는 모양이다. 진앙 가지안테프는 튀르키예를 아랍 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도시로 시리아 난민으로 가득하다. 오히려 아랍인 인구가 더 많은 곳이다.

튀르키예는 전 국민의 20%가 넘는 2천3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시리아는 통계도 잡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속수무책으로 눈앞에서 생명을 잃어가는 참극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폰 클라이스트(H. v. Kleist·1777~1811)라는 독일 작가의 단편 소설 '칠레의 지진'은 1647년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금지된 사랑으로 아기까지 낳게 된 제로니모와 요세페는 사형을 기다리고 있던 중 지진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구하게 된다. 폐허 속에서 안도의 숨을 쉬기도 전 생면부지의 페르난도 부부가 찾아와 도움을 청한다. 젖이 떨어져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에게 모유를 나눠 달라는 부탁이었다. 엄청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나눈 그 두 가족은 위기의 순간에 하나가 되는 큰 기쁨을 맛본다.

그러나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예배를 드리기 위해 찾아간 교회에서 그들은 지진보다 더 큰 진짜 비극을 맞게 된다. 지진의 참사가 도시를 소돔과 고모라로 만들어 버린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라는 설교 말씀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흥분했고, 제로니모와 요세페는 돌에 맞아 죽었다. 아기마저 목숨을 빼앗겼지만, 그것은 죄 없는 페르난도의 아기였다. 절망한 페르난도는 살아남은 제로니모의 아기를 안고 망연자실해했다.

죽은 자는 죄의 값을 받은 것이고, 살아남은 것은 축복의 결과라는 값싼 종교적 해석도 설득력이 없다. 절망 속에서 망연자실한 페르난도가 일궈가야 할 새로운 삶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맡겨진 고통스러운 과제다. 페르난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남을 정죄하는 일이 아니라 그의 아픔에 동참하여 고통을 나누는 일이다. 행여 이번 지진을 무슬림이라는 이교도들에게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한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도 지진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튀르키예 지진 참사에 가장 먼저 동참한 이들은 그들과 역사적으로 가장 적대적이요 앙숙이었던 그리스와 이스라엘, 그리고 아르메니아다.

튀르키예는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나라다. 흉노-돌궐-위구르 제국 시대에 고조선-고구려-발해가 서로 만나면서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전쟁 때는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5천 명이라는 대규모 여단 병력을 파병해서 그야말로 혈맹관계를 이루었다. 전쟁이 끝나고 참담한 상황에서 터키 군인들은 자신의 월급을 갹출해 '앙카라 고아원'을 세우고 오갈 데 없는 전쟁 고아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기까지 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함께 살아남은 자들이 가진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남의 아기에게 나의 젖을 물려줄 수 있는 인류애가 발휘되어야 한다. 그것은 참극을 입은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을 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요 책임이다. '진노의 날'은 절망한 인간들에게 다시 일어나라는 신의 목소리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