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애도 과정과 우울에 대하여

입력 2023-01-19 14:30:00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병원을 방문한 환자를 분석해보니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연령대별로는 4~50대 비율이 가장 높았다. 의사가 여자이고 동네 병원이라 접근이 용이한 점, 또한 요즘은 스트레스가 있으면 빨리 정신과를 찾아 치료받고자 하는 생각의 전환도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정신과는 이상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거나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성격 나쁜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생각은 우스꽝스런 편견이었음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정신과 문턱을 낮추었다. 생각의 필터를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파란색 썬글라스를 쓰면 세상이 다 파랗게 보이지 않는가.

필자도 우울증으로 힘든 때가 있었다. 평소 지병 하나 없이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가장 소중했던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열심히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내게 이런 역경이 닥쳤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한동안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를 더 힘들게 한 것은 '나도 이제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선언이었다. 결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는데, 남편이 떠나자 어머니도 떠났다. 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내면서 '애써 키운 딸, 저 집 좋은 일만 시켰다'고 했고, 그 말은 나의 가슴팍에 깊이 꽂혔다.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릴 때부터 보아온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습이 떠올라서 나를 위한 삶은 결혼해서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함께 살면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워주시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막강한 시부모님은 매일 우리 집을 드나들었고,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그리고 나의 삼각관계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낮 동안 있었던 두 어머니간의 갈등, 육아 도우미 이모와 있었던 파란만장한 사건들에 대한 푸념을 듣느라 저녁 시간이 더 힘들었다.

친정 식구들은 너무 친밀해서 서로간의 바운더리를 쉽게 넘나들면서 오히려 마음의 짐이 더 커져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족의 역학에 떠밀리면서 결국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많이 우울했다. 아무리 가까워도 심리적 거리를 두어야함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장 힘든 시기에 옆에 있어주기를 바랬던 가까운 사람들이 떠나고, 애도 과정에서 겪는 온갖 감정과 슬픔을 몸소 겪으면서, 나는 좀 더 성숙한 정신과 의사가 되어갔다. 환자들의 사정도 잘 이해하게 되고, 아무리 치료해도 낫지 않는 사람들의 절망감과 원망도 수용할 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좋은 일만 있고 좋은 감정만 느끼며 사는 게 아니다. 매일 날씨가 좋아야 되고, 춥거나 비가오거나 바람이 부는 건 안 되.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항상 고통스러울 것이다. 삶을 의미 있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즐거움과 고통 둘 다일 것이다.

내가 겪어본 탓인지 상실로 인한 우울증으로 내원하는 분들을 많이 치료하게 되었다. 그들은 고통스런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 회복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잊으려할수록 더 생각나고, 억누를수록 더 튀어오르는게 트라우마 기억이 아니던가. 아픈 기억이 떠올라도 낙담하지 않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방해하지 않도록 흘려보내고 꿋꿋이 살아내는 것이 회복하는 길이다.

얼마 전 유명한 여자 의사가 자신의 우울증 투병 과정을 밝힌 기사를 보았다. 수년간의 약물치료와 난치성 경과로 인해 전기경련요법(electroconvulsive therapy)까지 받았다고 한다. 여러 가지 약물 사용에도 반응하지 않는 난치성 우울증은 전기경련요법이나 스프라바토(케타민 나잘 스프레이)등의 치료법이 효과적이다.

이것은 손상된 뇌 회로를 빠르게 복구시켜서, 기분을 발병 전으로 회복하게 도와준다. 우울증을 감추고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아주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우울증 환자수를 성별 연령대별로 분석해보면, 여성이 63만명으로, 30만명인 남성보다 2배 많았고 20대 청년층의 증가세가 두르러졌다. 또한 남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죽어가는 고독사의 절반 이상이 5~60대 남자라는 통계가 있다.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강한 모습의 페르조나로 살아오다가, 생의 전환기에 실패를 경험하게 되면, 남들에게 알려지고 짐이 되느니 차라리 실종되거나 자살을 선택하려는 남자들이 많다.

남성은 흑백의 극단적인 태도를 보여서 남자가 죽고 싶다고 할 때는 위험성을 훨씬 높게 평가해야 한다.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당연한 과정들이고,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낸 인내와 노력의 결과가 잘 살아내는 삶임을 수용하고, 삶이 그러함에도 여전히 살아가기를 함께 노력해간다.

요가나 헬스 등 홈트레이닝 어플이 인기가 있듯이, 마음을 달래주는 홈트도 많이 생겨났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주기적으로 체크해보고, 치료가 필요한 정도라면 정신과를 방문해서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영화 <쇼생크 탈출> 에 두려움은 너를 죄수로 가두고 희망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대사가 있다.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 때문에 우울증을 숨기고 치료받지 않는다면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죄수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정신건강의학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