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근대사] 봉오동·청산리 대첩 신화의 진실

입력 2023-01-16 14:37:23 수정 2023-01-16 17:50:12

300배 이상 부풀려진 전과…불굴의 정신만은 과장 없었다
봉오동 전투 일본군 157명 사살…청산리는 日 1000∼3300명 피해
독립군 전사는 4∼60명 뿐 대승…임시정부 주장 뚜렷한 근거 부족

봉오동 전투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인 야스카와 추격대의 전투상보 내용.

일제 36년 식민 통치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 감동의 파노라마로 각인된 영광의 사건이 봉오동·청산리 전투다. 만주벌판, 그 눈보라를 뚫고 풍찬노숙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거둔 빛나는 항일 무장투쟁의 승전보였으니, '대첩(大捷)'이라는 표현도 미진하다고 생각할 정도다.

그런데 만주·연해주 일대서 활동한 우리의 항일 무장 독립군은 무기라고 해봤자 소총·권총·수류탄 등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훈련이나 보급은 물론 탄약이나 기초 식량, 의복조차 갖추지 못했다.

중국 구이저우(貴州)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간도로 간 김홍일은 1921년 3월 29일, 장백현에서 대한독립군비단이란 독립군 부대에 합류했다. 김홍일은 눈앞에 나타난 이 부대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장교는 사령관 임표, 신흥무관학교 출신 조경호 두 명뿐이었다. 병사는 255명이었는데, 그중 50명만 독립군 출신이라 전투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 대원은 함경도 개마고원 산간벽지인 삼수, 갑산에서 모병하여 온 신병이어서 전투 경험은 물론 제대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무기도 일제 소총 21정과 권총 3자루, 수류탄이 두어 개…. 복장은 다 낡은 한복 차림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맨주먹의 부대였다."(김홍일, 『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89쪽)

병력 255명에 소총이 21자루였으니 이 부대는 병사 12명당 소총 한 자루, 무장 독립군 부대라고 하기엔 민망한 수준이었다. 이런 수준의 항일 독립군이 무슨 신출귀몰한 전술 전략으로 막강한 일본군 정규군에게 대첩을 거두었을까? 이런 식의 이성적·논리적 의문을 제기하면 그 즉시 친일파니, 토착 왜구니 하는 날 선 비판이 쏟아진다.

그렇다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구체적인 승전 내용을 따져본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의 경우 1920년 6월 7일 단 한 차례 전투에서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의 피해를 줬다. 반면에 우리 독립군은 전사 4명(장교 1, 병사 3), 중상 2명에 불과했다.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도 우리 독립군이 승리한 이유는 3·1운동 이후 크게 앙양된 독립군의 사기와 지리적 이점을 적절하게 활용한 지휘관의 전략 때문으로 분석했다(김삼웅, 『홍범도 평전-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도서출판 레드우드, 2019, 138·141쪽).

봉오동 전투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인 야스카와 추격대의 전투상보 표지.
봉오동 전투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인 야스카와 추격대의 전투상보 내용.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과가 실제보다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증언한 독립운동가 김학철 씨.
봉오동 전투에 대한 일본 측 기록인 야스카와 추격대의 전투상보 표지.

청산리 전투는 '간도 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수립한 일본군이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8개월간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간도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한국인의 저항 의지를 차단하고, 독립군을 한인 마을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최신형 대포, 항공기, 기관총 등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최신 무기를 동원하여 입체적인 합동작전을 전개했다.

일본군이 대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 부대를 그물망처럼 에워싸자 독립군 지도자들은 10월 초, 화룡현 삼도구에서 대책을 협의했다. 대세가 전투를 피하자는 입장이었으나, 이미 독립군 근거지가 포위되었다. 독립군이 탈출하고자 포위망을 뚫는 도중 발생한 것이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일대에서 10월 21일부터 7일간 10여 차례 계속된 전투 결과는 김삼웅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 독립군의 10전 10승. 구체적인 전과는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고, 독립군은 사상자 150명의 피해를 입은 대승이었다(김삼웅, 앞의 책, 179쪽).

청산리 전투에 대한 상해 임정의 공식 발표는 일본군 사망자 1,254명,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약 1,000명, 전투에 직접 참여했던 이범석은 회고록 『우둥불』에서 일본군 사상자 3,300명이지만 독립군 피해는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 실종 200여 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곳곳에서 전과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다. 일본방위대 교수 사사키 하루다카(佐佐木春隆)의 『조선전쟁 전사로서의 한국독립운동의 연구』에서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 추격대가 한국 독립군 24명을 사살하고 부상자 다수를 냈으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명이었다. 청산리 일대에서는 일본군은 전사자 11명, 부상자 24명, 말 10필의 희생을 치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사사키 교수가 봉오동 전투 전과의 근거로 삼은 자료는 야스카와 추격대가 작성한 '봉오동 부근 전투상보'다. 이 상보에는 봉오동에서 일본군 피해는 병사 1명 전사, 2명 부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효승(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기존의 사료를 꼼꼼히 검토한 결과 청산리전투의 전과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사키 교수처럼 청산리전투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했다는 주장도 문제지만, 청산리 전역에 대한 정확한 전과의 전달보다 독립군의 건재, 독립 의지의 표명을 위해 불분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청산리 대첩'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은 여러 자료를 토대로 봉오동에선 일본군 100여 명 살상, 청산리에선 일본군 400~500여 명이 살상되었으며, 우리 독립군도 그에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156쪽).

우리 독립군도 일본 못지않은 피해를 본 것으로 봐야 한다는 장세윤의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봉오동·청산리전투는 '대첩'이 아니라 '무승부'로 정정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 아닐까?

봉오동·청산리 전투 전과가 실제보다 심하게 과장되었다고 증언한 독립운동가 김학철 씨.

마지막으로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됐던 무장 독립투쟁가 김학철의 솔직한 평을 소개한다.

"우리 독립운동사는 신화에 가까울 정도로 과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요. (중략) 내 경험으로 볼 때 봉오동 전투니 청산리 전투에서의 전과는 적어도 300배 이상 과장된 것이에요. 우리의 항일 무장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살아남은 정신의 투쟁이지, '대첩'이나 '혁혁한 전과'는 불가능한 전력이었어요. 일본군과 맞닥뜨렸을 때 열에 아홉 번은 졌어요. 어쩌다가 한 번 '이긴' 경우도 일본군 서너 명 정도 사살하면 대 전과로 여겼어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꾸 지면서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날까지 계속 달려든 것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안경환 서울대 법대 교수의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옹과의 병상 인터뷰', 『월간참여사회』, 2001년 9월호)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