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기록여행] 봉급쟁이보다 두 배 많은 기생월급

입력 2023-01-05 11:38:57 수정 2023-01-05 17:12:56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17일 자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17일 자

'~광명이 있으라고 인민은 주야로 빌건만 만추의 석양만이 떨어지는 낙엽에 오늘의 이별을 고할 뿐 빈궁의 마수는 여전히 가련한 생명을 노리고 있구나. 아! 언제나 이 물가고 생활난이 이 땅에서 해 맞은 서리처럼 사라지고 미소하는 인생의 호류가 삼천리 강토에 굽이칠 것인가!~ 노동자층의 비참한 생활현상을 지배하는 수입을 조사한 결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17일 자)

해방되면 희망이 넘치는 밝은 세상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이 일상을 위태롭게 했다. 살길이 막막해 노상을 배회하는 가련한 부민들이 적지 않았다. 백성을 등쳐먹는 모리배는 여전히 활개 쳤다. 이런 절망 속에도 어쩌다가 기운을 북돋우는 기분 좋은 소리도 들렸다.

토지와 집을 팔아 조국 재건에 이바지하려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부민들은 생활고에 지쳐있었지만 이런 소식에 잠시나마 위안을 받았다. 이런 위안도 잠시뿐,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해방 1년 만에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대구부내에서 거래되는 쌀은 한 말(10되) 80원에서 1,200원까지 치솟았다. 평균 900원을 오르내렸다. 월급 대신 쌀을 달라는 말이 봉급생활자들 입에서 나올 정도였다. 물가는 짧은 시간에 2~3배는 보통이고 10배까지 오른 품목도 여럿이었다. 월급으로는 엄동설한에 방 하나 데울 정도의 장작조차 살 수 없었다. 열차 운임처럼 갑자기 2배로 인상되는 일도 흔했다.

월급쟁이가 노점상보다 못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양담배와 통조림을 파는 노점상의 수입이 더 많았다. 길거리의 우동 장사도 월급노동자보다 많이 벌었다. 빈대떡집 같은 음식점도 월급노동자의 수입과는 큰 차이가 났다. 향학열과 부족한 서적 때문이었는지 헌책방의 수입도 월급노동자를 앞섰다. 조사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어도 월급노동자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해마다 봉급이 작게 오른 것은 아니었다. 월급이 아무리 올라도 물가의 오름세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이러다 보니 고물가는 생산자나 유통업자보다 봉급생활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었다. 봉급생활자 중에도 공무원의 사정은 더 딱했다. 박봉이라는 말대로 생계에 어려움을 안겼다. 얇은 월급봉투는 여러 부작용을 불러왔다. 이권과 뒷돈을 챙기는 등의 수뢰와 독직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해방 3년이 넘어도 봉급으로 생계를 꾸릴 수 없다는 불만은 계속 쌓였다. 1948년 11월 신문에는 대구부내 봉급 노동자의 월급 기사가 실렸다. 봉급 노동자는 대학을 나온 정신적 노동자와 그날그날 겨우 끼니를 이어가는 육체적 노동자로 구분했다. 정신적 노동자는 회사와 관공서 근무자였다. 회사에 다니는 노동자는 월급이 9천 원에서 1만2~3천 원이었다. 이에 비해 공무원 같은 관공서 노동자는 약 4천 원에서 8~9천 원으로 이보다 적었다.

월급 수입이 많은 노동자는 따로 있었다. 요정 같은 유흥장에서 일하는 기생과 작부, 요리사였다. 기생은 놀음차인 화대로 시간당 150원을 받았다.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면 1만 6천 원이 넘었다. 봉급쟁이보다 평균 두 배나 수입이 많았다. 작부는 1만~1만 5천 원을 벌었다. 요리사는 8천~1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서울에서는 여급이나 기생의 수입이 대구의 조사에 비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밤거리의 악사도 수입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의 생활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화장품이나 의상구입 등의 지출 비용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육체적 노동자에 속하는 자유노동자의 수입은 시원찮았다. 막일꾼(노가다)인 공사장 일꾼은 하루에 400~500원, 지게꾼 노동자는 300~400원을 벌었다. 일없이 공치는 날이 많은 탓에 한 달 1만 원을 넘기기 힘들었다. 힘겨운 육체노동이었지만 품팔이 일꾼들의 품값은 가장 쌌다. 노동의 세기와는 반비례했다. 품팔이 노동자의 수입은 수레(구루마)에서 떡을 팔거나 길거리 음식 장사에도 못 미쳤다.

수레나 길거리 음식 장사는 하루 500원에서 많게는 1천 원을 벌었다. 재료비나 수레 마련에 5천 원 이상의 비용이 들었다. 도로변의 건물에 세 들어 연 잡화점은 수입이 더 나았다. 하루 1천 원 정도를 벌었다. 길목이 좋은 점포는 권리금만 30만 원에 달했다. 당시는 자전거를 지켜주는 자전거 보관업이 있었다. 큰 회사나 관공서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이들이 많았다. 자전거를 그냥 세워두면 잃어버리기 일쑤였다. 도둑으로부터 자전거를 지켜주는 일이었다. 하루에 50~60대를 맡으면 500~600원의 수입이 생겼다.

힘들었던 그 시절 기생이나 여급의 한 달 수입은 봉급생활자의 월급보다 많았다. 유흥의 공간에서 돈을 물 쓰듯 하는 일부 계층의 씀씀이 덕이었다. 이렇듯 살림살이의 격차는 언제나 컸다. 경제가 뒤틀리면 어려운 사람은 더 어렵다. 토끼띠 새해도 그럴 것이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