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진 지음/ 북스토리 펴냄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야 하니? 엄마가?"
지난달 방영된, 간절하게 결혼을 원하는 솔로 남녀들이 사랑을 찾기 위해 일주일간 한 곳에 모여 고군분투하는 지상파의 한 데이팅 프로그램. 관심 있던 남자에게 거절 당한 '옥순'(가명)이 숙소로 돌아온 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살면서 연애다운 연애를 단 한 번도 못해본 옥순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하고 싶었다며 엄마에게 하소연하지만, 옥순의 엄마는 "너만 보면 답답하다", "그러면 너 거기 뭐하러 갔느냐"며 속상한 말을 내뱉는다. 옥순은 펑펑 운다.
인생의 동반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옥순처럼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나서지만, 정작 평생의 짝은 나타나지 않고 부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그런 경험. 누구나 갖고 있지 않은가.
첫 에세이집을 펴낸 안혜진 작가도 그랬다.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면서 결혼 압박은 심해지는 시기, 저자도 이 지점에서 갈등한다.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지라는 모호한 의무감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렇게 한 발 내딛은 곳이 맞선 시장이다.
"어떤 남성이 (카페에) 들어왔는데, 당연히 그 남성은 아니겠지 싶었다. 아는 동생이(주선자) 나에게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 사이인데 당연히 아닐 거라 생각했다."
"(선남은) 앞머리를 누군가와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은 듯 하늘을 향해 왁스로 고정시켰다. 태어나서 그런 앞머리를 한 사람은 처음 봤는데, 앞머리에 세로로 김을 붙인 것처럼 하늘을 향해 있었다."
"시원하게 보이는 (선남의) 뻐드렁니를 직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로해져갔다…."
책의 매력은 솔직함이다. 저자는 선 시장에서 만난 '별의별' 남자에 대해 과감없이 드러낸다. 글을 쓰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면서도 맞춤법을 많이 틀리는 남자, 휴대전화 화면에 자신이 먹은 온갖 음식물 자국을 남기는 남자, 혼자 술에 취해 첫 만남부터 연거푸 고백하는 남자. 이들을 상대한 저자는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지만 마음은 이미 전쟁터다.
솔직함을 넘어 시원하다. 마치 가장 친한 친구에게만 털어놓을 법한 '선 후기'를 저자는 독자에게 선물한다. 마음에 들지 않은 선남에 대해 생생하게 고백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선남과의 유머러스한 에피소드는 총 14건에 이른다. 마냥 웃기지만은 않다. 의무감에 '맞선'이라는 원치 않는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부모에 등 떠밀려 억지로 맞선 시장에 나왔다 해도 정작 이는 스스로가 선택한 '나'를 위한 일이다. 그럼에도 맞선 시장에 나온 내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내가 왜 선을 봐야해?"라는 마지막 자존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품격을 지켜보겠다며 초연하게 '나는 여기 나올 사람이 아니야'라는 연기도 해보지만 결국 저자는 고백한다.
"선을 보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힘이 아니라 부모님의 힘을 얻어서 나가게 된, 그런 자리가 부끄러웠다.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성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야 할 도리를 전혀 못 하고 있는, 능력 없는 패배자라는 느낌이 매번 들었다. "
학교에서 숙제를 해오지 않아 선생님께 혼날 위기를 처했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건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는 친구가 아닌 똑같이 숙제를 안 해 온 '친구'의 존재다.
이 책도 함께 숙제를 하지 않은 친구 같다. 인륜지대사인 결혼에 골인하기 위해 고작 몇 시간 만에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지 아닌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 모든 이에게 이토록 '부자연스러운 만남'을 나도 이어가봤으니 이제 싫으면 싫다고, 솔직하게 내 길을 가자며 묵직하게 위로한다. 228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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