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황태자가 경주 고분을 발굴한 까닭은?
대지진 후 재정난 총독부, 발굴 소극적…경주박물관장, 驛공사 봉토 활용 '묘수'
흙 운반 철로 만들어 난폭한 방식 발굴
조선 문화 수호 이미지 원하던 총독부 日 신혼여행 온 황태자 대외홍보 활용
'스웨덴의 瑞+봉황의 봉(鳳)' 이름 붙여져
이제 돔형 건물로 보호된 금관총의 바로 서쪽 옆에 있는 서봉총(瑞鳳塚)으로 가보자. 서봉총은 봉토가 거의 깎여 있어 모르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고분이다.
자세히 보면 무덤 두 개가 접한 쌍분인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드높은 봉토가 쌓여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납작한 모습인가? 무덤 앞에는 '서전(瑞典) 국왕 구스타프 6세 폐하 서봉총 발굴 기념비'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서전(瑞典)'이란 스웨덴의 한자 표기이다. 이것을 보면 스웨덴 왕실의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 무덤의 발굴조사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는 머나먼 경주까지 와서 고분 발굴에 참여했는가?
"금관을 비롯한 모든 부장품을 그대로 두고 전하의 도착을 기다리겠다."
이 짧은 글은 1926년 9월 말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서봉총 발굴을 담당한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897-1993)가 교토제국대학 고고학교실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 1881-1938)에게 보낸 전보이다.
그때 금관총 서쪽 옆에 있는, 후일 '서봉총(瑞鳳塚)'이라고 불리게 되는 신라 고분에서는 조선총독부에 의한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2주일 정도 뒤에는 그 현장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유명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와서 발굴조사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이 전보를 통해서 고이즈미가 그 무덤에서 발견한 금관을 비롯한 부장품을 수습하지 않고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마치 처음으로 발굴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원위치로 다시 메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조작'인 셈이다. 서봉총 발굴조사가 순수한 학술조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곗바늘을 5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1921년 9월 말 금관총에서 우연히 발견된 어마어마한 양의 화려한 부장품은 고대 신라의 영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천년의 고도 경주'의 위상을 한층 더 높였다. 조선 각지나 일본에서 많은 관광객이 경주로 오게 되었다. 경주 수학여행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이다.
탁월한 처세술로 경주 지역사회의 권력자가 된 경주박물관장 모로가 히데오나 경주 일본인 상인들은 금관총뿐만 아니라 다른 고분도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다. 새로운 고분 발굴을 통하여 더 많은 보물이 발견되면 될수록 관광지로서 경주의 위상은 높아지고, 그런 보물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신라 고분 발굴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 특히 1923년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조선총독부는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로가 히데오는 집요했다.
1924년 4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조선 남부 시찰 길에 경주로 왔을 때, 모로가는 사이토와 같이 봉황대에 올라가서 바로 남쪽에 있는 봉토가 많이 손상된 고분 2개를 발굴하도록 설득했다.
사이토는 모로가의 요청에 응하고 재정이 어려운 총독부 대신에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발굴 비용을 부담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하여 1924년에 발굴된 것이 금령총과 식리총이다. 그 성과는 금관총에 못지않았다.
다음으로 모로가가 노린 것은 금관총 서쪽 옆에 있는 고분이었다.
이 고분의 경우 많이 남아 있는 봉토가 문제가 되었다. 대량의 봉토를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인부가 필요하여 만만치 않은 인건비가 예상되었다. 또한 많은 흙을 어디로 옮기는가에 대해 대책을 세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때 모로가와 고이즈미가 계책을 꾸몄다. 서봉총을 발굴하려고 했던 1926년은 경주역을 새롭게 짓고 기관고를 설치하는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1918년에 현 서라벌문화회관 자리에 개업된 경주역은 관광도시의 현관으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건물이었으며, 대구나 포항에서 경주에 들어오려면 형산강(서천) 건너편의 서악역에서 한번 갈아타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고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공사는 시작되었다. 이 공사에는 정지작업을 위해서 많은 흙이 필요했으며 원 래 다른 곳에서 흙을 가져올 계획이었으나 어떤 사정으로 흙 반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에 모로가나 고이즈미는 경주역 신축·확장 공사에 필요한 흙으로 서봉총 봉토를 활용하는 것을 착상했다. 당시 서봉총 발굴 현장의 사진에는 서봉총 밑에 비스듬하게 통하는 철로가 보인다. 이것은 서봉총에서 경주역까지 흙을 운반하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부설된 철로이다.
지금이라면 있을 수 없는 난폭한 발굴 방식이다. 믿기 어렵지만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부지에는 서봉총 봉토의 흙이 섞여 있다.
서봉총 발굴은 1926년 7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마침 신혼여행으로 세계 각국을 방문 중이던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부부가 일본에 체재하고 있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고고학에 상당히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교토제국대학 고고학교실 교수 하마다 고사쿠가 그를 교토·나라를 비롯한 일본 유적지로 안내하고 있었다. 이때 구스타프는 경주에 가서 신라 고분 발굴에 참여하면 어떻겠냐라는 제안을 받았다. 동양 고고학에 특히 관심이 많았던 구스타프는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 제안은 하마다가 생각한 것으로 보이지만 고고학자의 단순한 개인적 착상으로 볼 수 없다. 당시 조선에서는 사이토 총독을 중심으로 '문화통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총독부는 '무단통치'의 한계를 깨달아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었다. '문화통치'라는 것은 조선인에게 일정한 '자유'를 줌으로써 '친일파'를 양성하여 민족분단을 노리는 술책이었다. 당시 총독부가 공들이고 있는 것이 '대외홍보'였다. 특히 3·1운동 탄압 이후 외국에서는 조선총독부 정책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 목소리가 속출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그런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선정(善政)'을 보여주는 대외홍보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원래 총독부가 펼친 고적조사(고고학적 조사)는 '일선동조론'이나 '신공황후 삼한정벌설'과 같은 식민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물질적 증거를 찾으려는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1926년은 총독부가 '문화통치' 아래 '대외홍보'에 열성을 올리고 있는 시기였다. 총독부는 마치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선한 '보호자'라는 이미지를 널리 심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서봉총 발굴은 '대외홍보'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 그것은 총독부 연출로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주역으로 발탁되어 진행된 교묘한 '정치쇼'였다.
'서봉총(瑞鳳塚)'이라는 명칭은 스웨덴(서전[瑞典])의 '서(瑞)' 자와 거기서 출토된 봉황(鳳凰)이 장식된 금관의 '봉(鳳)' 자를 합쳐서 지어진 이름이다.
서봉총은 고대 신라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경주 근대사의 주요 무대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봉황대 주변, 즉 노서동·노동동 고분군의 '근대사'를 살펴보았다. 더 이야기할 것들이 있지만 슬슬 여기를 떠나볼까 한다. 다음 회부터는 홍살문을 지나 '혼마치도리(현 봉황로)'를 따라 경주읍성을 향하고자 한다.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연구원 아라키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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