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격정의 문장들

입력 2022-11-24 14:10:15 수정 2022-11-25 18:52:46

김경미 지음/ 푸른역사 펴냄

낙서 윤덕희(1685~1776)의
낙서 윤덕희(1685~1776)의 '책 읽는 여인'.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재상의 손자요 사족의 아들인데, 사람됨이 특히 모자라고 행동이 경솔하고 무례하며 가난한 선비를 능멸하고 사람들을 무시한다."

19세기 후반 기생 출신 초월이 첩이 된 후 남편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한 글 일부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의 남편을 향해 "지각이 없어 소견이 어둡고 생각이 막혀 있으니 밥 부대일 뿐"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삭탈관직하고 시골에 보내 10년간 성현의 글만 읽도록 하면 좋겠다"고도 썼다. 유교 규범이 확고하던 조선시대, 남편을 '밥벌레'(밥부대)라 칭한 기개가 예사롭지 않다.

초월은 2만1천여 자에 이르는 이 글을 통해 남편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적폐까지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고을의 일만 번거롭게 하고 부자는 면죄해 주고 가난한 자만 재앙을 입게 하는 어사제도의 폐단을 지적했다. 임금이 기생을 가까이하며 중전을 박대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 과거제도의 폐단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과거장 자리다툼에 억울하게 시골 선비만 욕을 당하고, 합격하는 사람은 권문세가의 자제들, 수령의 자제들, 시험관의 일가친척, 의주나 송경의 부잣집 자식들이라고 꼬집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글이 아니라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관인이나 유생이 아니면 쓸 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상소문의 화자가 여성이라는 건, 조선시대에 이미 여성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발화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김경미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가 최근 펴낸 '격정의 문장들'은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여성들이 공적 창구를 통해 냈던 목소리에 주목한 책이다. 백성들이 글로 임금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언'(上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지나가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 하소연하던 '격쟁'(擊錚) 등을 두루 다룬다.

지은이는 조선 후기와 근대 계몽기로 나눠 여성들의 글을 분석했다. 전자에선 상언‧격쟁 등을, 후자에서는 주로 신문의 여성 독자 투고를 다룬다.

이 책에 따르면 왕족 여성부터 양반, 평민, 기녀 등 다양한 여성이 상언을 올렸다. 1752년(영조 28)부터 1910년(순종 4)까지 총 4천427건의 상언과 격쟁이 접수됐고, 이 중 약 10%에 해당하는 405건을 여성들이 제기했다.

그중 '김씨 상언'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다. '구운몽'을 쓴 김만중의 딸이자, 경종 때 숙청당했다 복권된 이이명의 아내 '광산 김씨'가 쓴 것이다. 그는 집안이 정쟁에 휘말려 멸문 목전에 있을 때, 종의 아이를 죽여 손주의 장례처럼 꾸몄다. 국법을 어겼으나, 조선의 근간인 가부장제와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강조한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양반의 특권의식과 순응적 태도가 있으나, 자칫 임금의 덕도 훼손된다는 전략적 글쓰기로 광산 김씨가 사건의 주체로 떠오르게 됐다"고 평가했다.

딸을 재가시킨 어머니의 항변도 눈길을 끈다. 어린 나이에 시집간 딸이 남편에게 버림받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딸이 측은해 양반가에 첩으로 보내지만, 딸은 절개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잡혀가게 된다. 이에 어머니는 "사회적 비난은 받을 수 있을지언정 관의 처벌을 받을 일은 아니다"라며 당당하게 딸의 구명을 요청한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 계몽 시기는 여성들이 본격적인 사회 주체로 변모한 시기다. 신문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다. 여성들은 독자 투고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여성의 교육권을 비롯해 건강과 몸, 여성 고유의 힘, 국제정세 문제 등으로 다양했다.

"여성 투고자들 중엔 스스로를 과부, 여노인, 첩, 기생, 소사로 명명한 다양한 여성들이 포함돼 있었다. 신문의 자투리 공간을 통해 새로운 여성주의적 주체로 나아간 이 여성들의 목소리는 한국 페미니즘의 초기 형태이자 여성운동의 초기 형태로 주목해야 한다."

지은이의 말이다. 308쪽, 2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