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상거래 발달에 유통단지 침체…점포 매매가 분양가보다 낮은 곳도
전층 권장용도, 편의시설 연면적 제한…복합몰 걸림돌 의견도
유통단지 내부 의견 통일 안돼…이견 조율 돼야 활성화 방안 찾을 수 있어
지난 20일 오후 1시쯤 대구 북구 산격동 종합유통단지(이하 유통단지) 중심 도로에 적막감이 흘렀다. 보행자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왕복 7차선 대로에 차량만 쌩쌩 오갔다.
일반의류관 내 아웃렛에는 물건을 구경하는 고객이 드문드문 보였다. 맞은편 혼수품 상가에서도 상인들끼리 대화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점포 정리 원가 세일', '매장 이전 정리 세일' 현수막이 곳곳에 걸렸고, 이 상가 2층 구석은 공실로 남아 텅 비어 있었다.
반면 캠핑·레저차량 박람회가 열린 대구 엑스코(EXCO)와 주변부는 활기가 돌았고, 펙스코(FXCO)는 전시장과 커피숍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웃렛에서 만난 상인은 "엑스코나 펙스코에는 사람이 많지만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는다. 오후 6시만 돼도 사람이 없어 거리가 컴컴하다. 오후 9시까지 영업해도 6시 반 이후에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국 최대 테마상가' 대구유통단지 침체 장기화
유통단지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993년 '전국 최대 규모 테마상가'를 표방하며 야심 차게 들어섰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기울었다.
처음 대구시는 중구 교동 전자상가, 대신동 서문시장 침구·의류거리 등에서 상인을 모아 산격동 일대 83만7천721㎡에 유통단지를 만들었다. 현재 7개 공동관(전자관·전자상가·섬유제품관·일반의류관·산업용재관·전기재료관·전기조명관)과 4개 개별관(기업관·업무편익·일반물류·철강물류)으로 이뤄져 있다.
상인들은 희망을 품고 생계 터전을 옮겼으나 손님 발걸음은 자꾸만 뜸해졌다. 교동 전자상가에서 직원을 최대 7명까지 두고 영업하던 한 업체는 유통단지 전기재료관으로 이주한 뒤 점차 직원 수를 줄였고 결국 가족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특히 섬유관과 의류관, 전자관 등 3개 공동관은 점포 매매가가 29년 전 최초 분양가와 같거나 그보다 낮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고 했다. 섬유관의 경우 1구좌(99.2㎡)당 2억8천만원에 분양했지만 최근 5천만원 감소한 2억3천만원에 거래된 것으로 파악됐다.
전기재료판매업협동조합의 한 조합원은 "조성 이후 10년 가까이는 장사가 잘됐는데 지금은 매출이 그 당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전자상거래가 있으니 찾아오는 손님이 자꾸 줄어든다"고 털어놨다.
민병렬 업무편익시설협의회장은 "유통단지가 너무 침체해 매출이 거의 바닥"이라며 "예전에는 오전 5~6시까지 대리운전 기사가 다녔는데, 지금은 오후 8시만 되면 일대가 고요해진다"라고 말했다.

◆관별 권장용도 확대 찬반, 상인마다 '동상이몽'
상인들은 전자상거래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상황이 나빠졌다고 입을 모은다. 온라인 거래 비중이 커지자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단순한 판매시설에서 벗어나 문화생활이 가능한 복합시설로 변모해 왔는데, 유통단지는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졌다는 것이다.
일부 조합원들은 '낡은 제도'가 발목을 잡았다고 주장한다. 대구시가 지구단위계획으로 관별 판매 품목을 제한한 게 대표적이다. 대구시는 당초 관별로 '전층 권장용도'를 정하고, 이들 시설을 건물 연면적의 50% 이상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예컨대 전자상가는 건물 절반 이상을 TV·냉장고 등 가전이나 휴대폰·컴퓨터 등 전자제품 판매점으로 채워야 하는 식이다. 대구시는 특정 공동관의 '전층 권장용도' 품목을 다른 공동관에서는 취급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이 규제 탓에 젊은 소비자가 선호하는 복합몰을 만들기는커녕 건물 용도에 맞는 업체를 입점시키기도 어려워 공실만 늘어난다는 푸념이 나온다.
섬유관 한 점주는 "매장이 텅텅 비어 나간다. 나가는 사람은 있는데 들어올 사람은 없다"라며 "공동관은 취급 품목이 제한돼 있어서 매장을 채우기 더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반면 또 다른 조합원은 생각이 전혀 다르다. 관별 특성을 살리고, 사업 영역을 보장한다는 취지에 맞게 용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품목 제한이 해제되면 도로 여건에 따라 양극화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우려한다. 각 관이 종합상가로 개발되면서 섬유관 등 중심 도로와 가까워 진입하기 편한 관에 사람이 몰리고, 의류관처럼 입지상 상대적으로 불리한 관은 고사 위기에 내몰릴 수 있어서다.
의류관사업협동조합의 한 조합원은 "당초 취지에 맞게 유지해야 한다. 업종이 섞이면 사람이 모두 대로변에 있는 관으로 갈 것"이라며 "대로에서 한 구간 멀리 있는 관은 아예 문을 닫게 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지구단위계획을 손봐 달라는 요구가 이어지면서 대구시는 관별 권장용도를 단계적으로 확대해 주는 상황이다. 지난 2012년 권장용도 확대와 함께 건폐율·용적률을 완화했고, 2019년에는 시설별 주·부속용도를 각각 확대하면서 의류관·섬유관 권장용도의 50% 이하로 상호 판매를 허용했다.

◆편의시설은 8% 제한… 용도 규정 사실상 유명무실
식당·카페와 같은 편의시설 설치 제한을 푸는 문제도 뜨거운 쟁점이다. 대구시는 지구단위계획으로 공동관 용도를 규정하면서 생필품 판매시설과 일반음식점·휴게음식점 등 편의시설은 연면적 8% 이내에만 설치하도록 했다.
편의시설 확대 설치를 원하는 관에서는 이 규정 탓에 집객시설 유치에 차질이 생긴다는 불만을 토로한다. 전자상가에서는 건물 꼭대기 층에 영화관을 유치하려 했지만 업체들이 사업성 부족을 이유로 고사해 성사되지 않았다.
반대로 제1·2종 근린생활시설, 위락시설, 숙박시설 등이 모인 업무편익시설지구 측에서는 무조건적 확대는 안 된다고 맞선다. 대구시가 처음 유통단지 용지를 분양할 때 편익지구는 다른 구역의 2배 정도 가격에 분양했기 때문이다.
전자상가 측은 "극장을 지어도 사실 식당가 같은 편의시설로 먹고사는데, 딱 8%로 묶여 있으니 누가 투자하겠느냐"라며 "유통단지는 30여년 전에 만든 규정에 매여 있다. 틀 자체를 바꿔야 고객이 머물면서 시간을 보낼 휴식 공간도 만들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특정 관에서는 권장용도 50% 이상, 편의시설 8% 이내 설치 규정이 사실상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구단위계획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을 사는 대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점주는 "다른 관에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눈감아 주는 분위기가 있다. 상황이 워낙 어려우니 버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유통단지 내부 단합 필요, 공통 입장부터 만들어야
정체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상인끼리 단합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각 관에서도 점포가 평균 250여개 정도로 많은 탓에 점주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 힘들고, 새 사업을 추진하기도 어렵다는 푸념이 끊이지 않는다.
전자관 한 관계자는 "관 차원에서 어떤 사업을 추진하려면 상인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야 하는데 협력을 안 해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전자관의 경우 울산 울주군에 있는 정크아트(junk art·폐품으로 만든 예술작품) 전시장을 참고해 주변 공개공지에 고철 로봇 전시를 열고 고객 쉼터로 꾸밀 계획을 세웠지만 자금이 부족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전문가들은 유통단지 내부에서 통일된 의견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이견을 조율하고, 자생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공공 영역에서 아무리 지원해도 활성화에 이르는 건 어렵다는 조언이다.
임규채 대구경북연구원 경제일자리연구실장(경제학 박사)은 "유통단지나 전통시장 같은 특수 상권 상인은 본인 사정을 먼저 생각해 공동 행동에 나서지 않는 편이다. 정부나 공공 기관이 운영을 지원하고 노력하더라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활성화는 불가능에 가깝다"라고 말했다.
대구시도 전체 의견이 하나로 모이면 유통단지 개발 방향을 정하고 실행 방법을 찾겠다는 입장이다.
최재원 대구시 민생경제과장은 "유통단지 활성화 방안을 고심하고 있지만 정책 방향을 정해둔 건 아니다"라며 "유통단지 내부에서 의견이 모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구체적인 제안이 나온다면 다른 부서와 협의하거나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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