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최순자 씨의 큰 언니 고 최순남 씨

입력 2022-11-24 10:29:27

최순자 씨의 큰언니 고 최순남 씨가 살아계실 때 세 자매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제일 왼쪽이 고 최순남 씨, 제일 오른쪽이 최순자 씨. 최순자 씨 제공.
최순자 씨의 큰언니 고 최순남 씨가 살아계실 때 세 자매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제일 왼쪽이 고 최순남 씨, 제일 오른쪽이 최순자 씨. 최순자 씨 제공.

저는 올해 '럭키 세븐'이 두 개 붙은 77세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61세 때 세상 빛을 본 8남매 중 막내이고 내가 그리워하는 우리 언니는 나와 14살 차이입니다.

언니는 지난해 8월 90세가 되자 내 마음에 그리움만 남겨놓고 저 하늘에 별이 되었습니다. 엄마같은 큰 언니는 작년에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그리움은 아직도 내 마음에 싹이 터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언니는 20살에 외동에다 군인 출신이신 형부를 만나 결혼해 아들 다섯 형제, 딸 세 자매를 낳아 작은 체구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살았습니다. 다행이 말년에는 쌍둥이 아들 덕에 그래도 '호강'이란 걸 해보고 돌아가셨어요.

내가 학교 졸업하고 언니 근처에 사시는 오빠 댁에 갔을 때 울 언니는 8남매의 엄마로써 고생고생하고 사셨어요. 그 때 내가 철이 들어 있었더라면 밥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줬을텐데 지금 생각하니 철 없었던 내가 원망스러워요.

언니는 이것저것 팔면서 가족들을 먹여살렸어요. 그 중 하나가 풍선입니다. 풍선을 부산 사투리로 '불통'이라 했는데 언니네 식구 있는대로 입으로 불통을 불어서(지금같으면 기계로 바람을 넣어서 쉽게 모양을 만들었을텐데) 팔러 다녔었지요. 그 때 언니의 작은 체구가 풍선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풍선에 묻힌 채 그걸 팔러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지금 생각하니 눈에 이슬이 맺힙니다.

그리 살다가 조금 여유가 생겨서 나중에는 위생재료(고무제품) 종류를 팔러 다니더군요. 그 때도 위생제품이 든 무겁고 큰 보따리를 키가 작은 언니가 머리에 이고 가는데, 그 뒷모습은 마치 오뚝이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언니는 오뚝이마냥 다행이 쓰러지지 않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쉬지 않고 열심히 살며 8남매를 교육시키고 출가시켰습니다.

젊은 시절 그토록 고생만 하다가 형편이 좋아져 살 만하니 62세에 형부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언니 큰 아들은 언니가 돈 좀 모아놓으면 가지고 도망을 가서 언니 속을 무척이나 썩였어요. 그렇게 도망간 아들을 수소문해서 겨우 찾아서 집으로 데려오면 또 가출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아놓은 돈을 몽땅 가지고 가는 바람에 언니가 많이 곤란해 했지요. 제가 봤을 때는 차라리 자식이 아니라 원수 같았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철이 들었는지 장가도 갔고, 가출도 안 하고 좀 나아졌어요.

8남매가 모두 짝지어 부산에 살면서 언니 생신때에는 모두 모입니다. 이제 옛날에 했던 고생은 멀리 사라지고 만나면 웃음바다를 만듭니다. 언니는 8남매 모두 결혼 시키고 분가까지 시켜 혼자 사시게 되니 많이 쓸쓸하고 외로웠던 모양이에요. 전화 통화할 때마다 놀러오라 했습니다. 하는 일 없이 바쁜 나는 가끔씩 가서 놀아 주었습니다.

한 번 가면 2박3일간 놀면서 언니가 좋아하는 고스톱도 같이 쳤습니다.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는 언니는 TV에서 노래만 나오면 음정박자는 어디로 시집보내고 언니 흥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어깨를 들썩들썩 춤도 잘 추고 그랬습니다. 한동안 몇 년을 천년지기 친구같이 추억을 많이 쌓았습니다.

내가 결혼할 때 언니는 부모 대신 귀한 자개농도 해 주고 용돈도 자주 줬었습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조카들과 오라하여 갔더니 언니는 제 앞에 흰 봉투를 내 놓았습니다. 우리한테 신세를 많이 입었다고, 금일봉을 넣었으니 언니 마음을 받아달라 하셨습니다. 사양 끝에 받기는 했지만 언니는 아마 이 때 천상에 갈 거라는 예감을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그런일이 있은 후 한 달 만에 요양병원에 가시더니 석 달 후에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저를 보살펴 준 그 은혜도 미처 다 못 갚았는데 언니는 그렇게 제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관계로 장례식엔 갔지만 장지에도 못 가고 올해 첫 기제사를 할 때도 못 가서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언니를 엄마같이 생각하고 살았는데…. 언니 없는 세상에 사진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언니 보고 싶을 때마다 스마트폰에 세 자매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달랩니다.

언니는 생전에 부처님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언니 또한 부처님같이 착하게 사셨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도 행복하게 사실 거라고 믿어요. 보고 싶어요. 만날 날이 가까워지니까 그 때까지 울 언니 안녕. 사랑해.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매일신문이 함께 나눕니다. '그립습니다'에 유명을 달리하신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 밖의 친한 사람들과 있었던 추억들과 그리움, 슬픔을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를 참고해 전하시면 됩니다.

▷분량 : 200자 원고지 8매, 고인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 1~2장

▷문의 전화: 053-251-1580

▷사연 신청 방법
1.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혹은 매일신문 홈페이지 '매일신문 추모관' 배너 클릭 후 '추모관 신청서' 링크 클릭

2. 이메일 missyou@imaeil.com

3. 카카오톡 플러스채널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검색 후 사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