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베테랑

입력 2022-11-10 18:14:50 수정 2022-11-10 19:40:07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사고 열흘째인 4일 오후 11시께 구조 당국은 고립됐던 작업자 2명이 생환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생환한 고립자들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 연합뉴스
경북 봉화군 아연 채굴 광산 매몰사고 열흘째인 4일 오후 11시께 구조 당국은 고립됐던 작업자 2명이 생환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이날 생환한 고립자들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 연합뉴스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황희진 디지털국 기자

봉화 광산 붕괴 사고 9일째. 작업반장 박정하(62) 씨의 구조를 기다리던 아들은 매일신문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광산업체 직원으로 25년간 일했고, 광부로는 12년째 일하고 계신 베테랑이다. 일하시면서 매몰 사고 등을 많이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늘 대비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갱도에 갇힌 지 10일째 된 날 박 씨는 신입 보조작업자 박 씨를 데리고 걸어서 갱도 밖으로 나왔다. 내부를 잘 알아 안전한 공간을 찾은 후, 비닐·나뭇가지로 텐트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했고, 커피믹스·지하수로 허기도 채운 덕분이었다. 아들 말대로 정말 베테랑이었다.

프랑스어 '베테랑'(veteran)은 한 분야에 장기간 종사해 기술이 뛰어나고 노련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설명할 때 꼭 포함되는 숫자, 즉 나이 때문인 듯하다.

올해 한국프로야구 통합 우승(정규리그와 한국시리즈 둘 다 우승)을 한 'SSG(에스에스지) 랜더스' 구성원들이 그랬다. 한국시리즈 최초 대타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친 마흔 살 최고령 MVP(최우수 선수) 김강민과 동갑내기 추신수를 비롯해 30대 중반의 최정·김광현 등 최고참급 베테랑들의 나이는, 그만큼 후배들과 팬들에게 믿음으로 전해졌다.

8일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열린 2022 프로야구 KBO리그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에서 키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SSG 추신수가 김강민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인천 SSG 랜더스필드에서 열린 2022 프로야구 KBO리그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에서 키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SSG 추신수가 김강민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 연합뉴스

나이가 별 상관 없는 경우도 있다. '이태원 참사'가 그랬다.

임용된 지 오래된 경찰 고위급들이 늦고 서툴러 업무상 과실치사상과 직무유기 혐의로 입건됐다. 오히려 추가 피해를 막고자 확성기도 없이 "사람이 죽고 있어요" "보고만 있지 말고 이동하세요"라고 목이 터져라 외친 이태원 파출소 소속 한 경사(순경과 경장 다음 계급이니 경력이 꽤 된다)가 그 지역을, 그때 상황을 잘 알아 그걸 바탕으로 임기응변을 발휘한 베테랑이었다.

베테랑은 '경험이 많아 역량이 뛰어난 퇴역 군인'을 말하는 '베테라누스'(veteranus)가 어원이다. 그러니 나이와 함께 퇴역 후 활약하고 있는지 여부도 베테랑의 한 분류 기준이 될 듯하다.

문득 두 인물이 떠오른다.

한 명은 검찰총장에서 퇴역해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또 한 명은 대통령에서 퇴역해 전임 대통령만의 정치 지형에 선 사람이다.

이들은 지난 6개월간 베테랑으로 살았을까?

아닌 것 같다.

현임 대통령의 검사 이력은 '검찰 공화국' 같은 수식엔 곧잘 붙었으나, 줄줄이 낙마 인사·연예계 스캔들 뉴스 같았던 '윤핵관' 논란·해외 순방 중 각종 실수 등이 베테랑과는 정반대의 '아마추어'라는 단어를 띄웠다.

전임 대통령도 이래저래 아마추어다. 퇴임 전 기자 간담회에서 괜히 "현실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특별히 주목을 끄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해 각종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리는 글과 사진이 연신 구설에 오른다. 요즘은 한때 남북 평화를 논의한 북한 지도자로부터 받은 풍산개를 반환(이라지만 '파양'으로 읽힌다)해 논란에 휩싸였다. 반려동물과 한가족처럼 살았고 '반려동물은 물건이 아니'라는 민법 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는 등으로 쌓은 이미지를 한순간 날려 버렸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통령만은 '40세 이상'을 조건으로 단 건, 일정 수준 이상 연륜 및 그에 따르는 실력을 요구하는 의도일 게다. 앞으로는 실수 없이 일 잘하는 베테랑 현임 대통령, 품격을 갖춰 존경받을 수 있는 베테랑 전임 대통령을 보고 싶다. 결코 길지 않은 삶에서 베테랑들이 대한민국을 이끌고 또 어루만지는 시대를 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