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영의 풍수이야기] 〈4〉구미 오태1동 마을

입력 2022-10-26 13:54:36 수정 2022-10-27 09:25:56

황금빛 까마귀의 둥지…'조선의 충절' 길재 선생의 터전
조선 왕 섬길 수 없다며 선산 은거…고려 왕조의 절의 지킨 야은 길재
명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생가…중앙 바라보지 않는 선생의 묘소

금오산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화상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금오산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화상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이름지었다.

영남의 대표적인 명산 구미 금오산(金烏山)은 예로부터 '왕기(王氣)가 서린 산'으로 불려 왔다. 금오산이란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금오산을 멀리서 조망해 보면 신령스러운 금 까마귀가 하늘로 비상하는 형상이다. 그 능선은 '왕(王)'자 같기도 하고,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의 와불(臥佛) 또는 거인(巨人)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금오란 삼족오(三足烏) 또는 세발 까마귀를 뜻하며, 고대 동아시아 지역에서 태양 속에 산다고 여겨졌던 전설의 새이다. 이는 태양 숭배 사상에서 출발한다. 해를 상징하는 원 안에 그려지며 고구려 고분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삼족오는 하늘의 제왕(태양)이 내린 군왕 배출의 천명(天命)을 땅으로 전해주는 사자(使者)로, 이러한 명에 의해 2명의 대통령이 배출되기도 했다.

길재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채미정
길재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채미정

◆길재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한 채미정

금오산 계곡 안에는 야은 길재 선생이 성리학을 공부했다는 도선굴(道詵窟)과 해운사(海雲寺)가 있고, 길재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세운 채미정(採薇亭)이 있다. '채미'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채미정은 흥기문(興起門)을 지나 우측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유허비각(遺墟碑閣)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채미정에서 바라보는 금오산은 가히 천하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 남구미 IC 인근 오태(吳太)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직진하다가 공단교 건너기 전 좌측 방향으로 400m를 가면 왼편에 오태 1동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금오산 정상에서 낙맥(落脈) 하는 산줄기가 중간에 효자봉을 기봉(起峰) 한 후 한줄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쪽으로 흘러가고 또 한줄기는 기봉과 굴곡(屈曲)을 거쳐 북동, 동, 동남 방향으로 내려오다가 낙동강을 만나 멈춘 곳에 만들어졌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오태란 '오산지하(烏山之下) 불견오산(不見烏山) 낙강지변(洛江之邊) 불견낙수(不見洛水), 오산 아래로되 금오산이 보이지 않고 낙동강이 바로 곁에 있으되 강이 보이지 않아 길지(吉地)이다'라고 전해진다.

오태1동 마을 전경
오태1동 마을 전경

◆오태동,청룡·백호의 관쇄

'오태'라는 마을 이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바로 태양 속의 까마귀 즉, 금오의 또 다른 표현이다. 현재 사용하는 오태는 한자로 나라 이름 '오(吳)', 클 '태(太)' 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나라 이름 '오(吳)'자가 아니라 까마귀 '오(烏)' 자를 써야 이치에 맞다. 이곳 오태 1동 마을은 까마귀 둥지 같은 형상으로 옛 지명이 오포(烏圃)이다.

동물이 집을 지을 때는 적을 발견하기 쉽고, 자신을 보호하기 유리한 곳에 집을 짓기 마련이다.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해 주듯이 청룡, 백호의 관쇄(關鎖)가 잘 되어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 까마귀 둥지 형상의 핵심 혈처(穴處) 부근에는 절의(節義)의 상징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가 있고 그 아래에 재실이 있다. 이곳 둥우리 주위에는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놀고 있다.

이곳의 주 혈처는 경좌 갑향(庚坐 甲向), 파구(破口)는 을(乙) 파의 자리이다. 이러한 자리를 천지정위격(天地定位格)이라 칭하는데, 이는 모든 일이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명당을 뜻한다. 경좌로 놓으면 천생산(天生山, 군왕사(君王砂))이 안산(案山)으로 딱 들어맞고 목민관(牧民官)이 출할 수 있는 자리인데 아쉽게도 현재 묘소는 전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까마귀 혈은 경좌 갑향이 진짜배기이다. 조류가 나무 위에 집을 지으려면 나무 기둥 중앙에 짓는 것이 아니고 기둥과 가지 사이에 짓는 이치와 같이 옆으로 살짝 틀어 혈(穴)을 맺는다. 현재 묘소는 나무 기둥 중간에 있는 모습이다. 묘소가 묘하게도 생가 터와 본인의 기질과 닮아있다.

야은 길재 선생 묘소
야은 길재 선생 묘소

길재(1353~1419)는 경북 구미시 고아읍 봉계리(鳳溪里, 현 봉한리 525-1, 유허비 소재)에서 태어났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아버지가 개경의 관료로 있었기에 청년 시절 개경으로 이주했고, 후에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8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학맥은 정몽주로부터, 길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졌다. 난세에도 고려에 절의를 지키고 학문에만 정진한 길재는 사후, 오히려 조선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절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야은 길재 선생 생가터
야은 길재 선생 생가터

야은 선생의 생가 터는 봉한리 522번지로 알려져 있으나, 해평 길씨 종친회장에게 문의하니 '유허비가 있는 곳이 생가 터'라고 확인시켜 주었다. 생가 터에서 주변의 산세(山勢)를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친 느낌이 있다. 비유하자면 저 멀리 중앙(군왕)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한쪽만 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터의 형상과 시류에 휘둘리지 않는 올곧은 선생의 심성(心性)을 감안한다면 유허비가 있는 곳이 생가 터가 맞는 것으로 본다.

지주중류비각
지주중류비각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

선산은 조선 전기 사림 정치의 중심이었다. 길재로 부터 시작된 선산(현 구미)의 성리학맥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신당(新堂) 정붕(鄭鵬), 송당(松堂) 박영(朴英),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으로 이어져 왔다. 사육신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생육신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도 선산의 인물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라고 하였다.

야은 선생 청룡 방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한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생가가 있고, 끝부분에는 '지주중류(砥柱中流)' 비각이 있다. 이 비는 1587년(선조 20)에 인동 현감 류운룡(柳雲龍)이 야은 선생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 묘역을 수리하고 주변에 사당과 서원을 창건하고 그 앞에 세운 비석이다.

'지주'라 함은 중국의 황하(黃河) 중류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석산(石山)으로, 탁류 가운데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산을 말하는 것으로, 굳게 절개를 지킨 야은 선생을 가리킨 것이다. 지금의 비석은 당시의 것이 아니고, 처음 세운 비석이 홍수에 유실되어 1780년(정조 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지주중류' 비는 충남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에 있는 청풍서원(淸風書院) 앞에도 세워져 있다.

비석 표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인 '砥柱中流' 4자를 새겼고, 뒤편에는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이 '지주중류'의 뜻과 그것이 후학들에게 주는 교훈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 비각도 천생산을 보고 놓아야 향법에 맞다.

출세에 눈멀고, 권력에 빌붙어 특권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횡행하는 시대에 출세와 부귀영화의 유혹을 뿌리치고, 절대 권력에도 뜻을 굽히지 않은 야은 선생의 절의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풍수가/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