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선 구수산도서관 사서
사서로서 첫 직장은 학교도서관이었는데,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내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공공도서관에서 근무할 때부터는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적어 아쉬웠다. 그나마 행사를 담당하면서 아이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작은 위안이 됐다.
그날 행사는 감명 깊은 책의 장면을 아크릴에 새겨 독서등을 만드는 날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낯익은 남학생 한 명이 휴대폰 속 작은 화면을 보고 힘겹게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이 책 빌려줄까" 내가 먼저 물으니, '긴긴밤'이란 책을 찾고 있다고 했다. 제목을 듣자마자, 동화책 제목이 참 아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직접 보니 여운을 남기는 제목과 배경, 그렇지 못한 그 속의 그림이 아이러니했다. 코뿔소와 펭귄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코뿔소가 펭귄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코뿔소가 펭귄을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궁금해졌다. 긴긴밤이. 꼭 다 읽으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남학생과 약속을 하고 퇴근 후 긴긴밤을 펴고 앉았다. 내용이 어렵거나 책이 두껍지 않아 부담 없이 잘 읽혔다. 읽을수록 자꾸만 죽어 나가는 동물들 때문에 코끝이 찡하고 목이 메였다.
책은 첫 장부터 눈길을 끌었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는 왜 많고, 왜 자식인 나는 이름이 없는가.
흰바위코뿔소 노든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밀렵꾼들에게 잃고 동물원으로 보내진다. 동물원에서 만난 또 다른 코뿔소 앙가부와 탈출과 복수를 꿈꾸지만 앙가부도 동물원 화재로 죽는다. 이렇게 노든은 지구상에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가 된다. 노든은 화재 속에서 알을 들고 탈출한 펭귄 치쿠를 만나 바다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삶의 이유가 복수였던 노든에게 치쿠와 알은 죽고 싶은 순간을 버티게 해주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존재였다.
알에서 무사히 부화한 책의 주인공 이름 없는 어린 펭귄은 노든을 보며 죽을힘으로 살아간다. 어린펭귄은 노든과 헤어지는 게 두려워 코뿔소로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그는 펭귄이었다. 노든을 떠나기 싫지만 자신이 떠나야 할 순간을 몸으로 느낀다. 노든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바다를 향하던 어린펭귄은 이 바다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긴긴밤이 있었는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긴긴밤을 홀로 보낼지를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봐, 아까는 미안했다. 자, 이리와, 안아줄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한없이 내가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시절마다 누군가 옆에 있어줘서 보잘것없고 불행하다고 느낀 순간들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의지가 되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흰바위코뿔소와 펭귄들이 보낸 길고 긴 긴긴밤, 서로를 의지하며 보냈던 긴긴밤. 이 책이 어디선가 홀로 긴긴밤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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