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인화의 온고지신] 삼봉이 필요한 시간

입력 2022-10-20 14:30:00 수정 2022-10-20 19:15:33

삼봉 정도전은 경북 봉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자라서는 약관 20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상사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는 성격인데다 외할머니가 노비의 딸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벼슬길이 순탄치 못했다. 이 무렵 나라 안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이 빚어낸 극심한 빈부 격차의 사회적 양극화 시대였다. 나라 밖은 팍스 몽골리아의 글로벌 경제가 무너지는 탈세계화의 전란기였다.

삼봉은 자신의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관직에 머물러 있다는 불만과 백성들에 대한 연민, 시국에 대한 걱정으로 속을 끓였다. 1375년 고려 조정은 공민왕의 독립노선을 포기하고 몽골의 잔존세력인 북원과 제휴하려 했다. 삼봉은 조정을 규탄하다가 전남 나주로 유배되었다.

이후 9년 동안 삼봉은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 자신의 장래에 절망한 남자, 광대뼈는 불거지고 볼은 퀭한데 쓸데없이 눈빛만 날카로운 남자로 살았다.

사회적으로 매장된 삼봉을 무덤에서 꺼내준 것은 동북면병마사 이성계였다. 공직에 복귀한 정도전은 위화도 회군 이후 개혁파 신진 사대부의 중심이 된다.

이때부터 건국의 대업에 매진하다가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는 10년간이 삼봉의 황금시대다. 이 시기 삼봉은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공공재(pubic goods)로 제공한다는 파천황의 개혁을 실천한다.

어느 사회나 문명의 혜택은 축척된 자본을 가진 특권층에게 돌아갔다. 왕, 귀족, 지주, 자본가로 이름은 계속 바뀌었지만, 특권층의 존재 자체는 변치 않았다. 삼봉은 특권층을 없애고 누구나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공공재를 보장하는 민본(民本)의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조선경국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천하의 백성으로 농토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고, 경작하지 못하는 자도 없었다. 빈부와 강약이 지나치게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토지에서 생산된 것들은 공공의 재산이 되어 나라가 부강했다. 지금은 권세가들이 땅을 빼앗아 부자의 농토는 끝없이 두둑을 잇는데 가난한 백성들은 송곳 하나 세울 땅도 없다."

21세기는 이윤 창출의 수단이 농경지에서 데이터로 변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이다.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분석되고 활용되는 스마트 플랫폼 환경이 거대한 부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는 삼봉의 시대와 유사한 고뇌를 안고 있다.

10월의 서울 합정동에서는 연초에 1만 3천 원이었던 갈비탕이 1만 8천 원에 팔리고 있다. 판교에서는 순두부 백반이 1만 5천 원이다. 이렇게 식비가 올라 농업의 채산성이 높아졌는데 농민은 계속 가난하고 지방은 인구 소멸의 절벽으로 떠밀려간다.

이것은 빅테크 플랫폼 기업이라는 권문세족이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의 데이터를 빼앗아 이윤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14세기 권문세족은 '원진전' 즉 쓰지 않는 농경지라서 내가 개발한다는 논리로 토지를 겸병했다. 21세기 권문세족은 "활용하지 않은 데이터는 데이터가 아니다!"는 논리로 데이터를 전유한다.

그 결과 네이버, 카카오, 배달의 민족, 쿠팡, 마켓 컬리 들이 310조의 한국 식품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땀 흘려 농사짓는 농민은 적자가 나도 빅테크 플랫폼은 지능화된 데이터의 유통망 때문에 항상 수익을 낸다.

뜻있는 사람들은 스마트화된 화란(네델란드) 농법을 도입해 농촌을 혁신하려 한다. 그러나 네델란드의 농가당 평균 경지 면적은 33.8헥타르임에 비해 한국은 1.6헥타르이다. 농사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면 한국의 농가당 경지 면적은 결코 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사람들은 생산된 것을 먹었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유통되는 것을 먹는다. 엄마가 직접 장을 보고 식자재를 다듬어 조리하는 전통적인 '집밥'은 쇠퇴했다. 이제는 식당에 가서 사 먹거나 식품공장에서 조리된 밀키트, 반찬, 간편식, 포장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

이런 대규모 주문형 소비 체제를 플랫폼 기업이 움직이고 있다. 데이터를 장악한 플랫폼 기업은 최종 사용자의 주문에 실시간 반응하는 라스트 마일 물류와 마케팅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발휘한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플랫폼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초거대 규모 인공지능(하이퍼 스케일 AI)을 도입한다는 사실이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어 정보를 찾던 검색(search)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인공지능에게 뭘 하라고 자연어 문장으로 명령하는 지시(prompt) 시대이다.

검색 시대에는 그나마 대상 데이터가 플랫폼 기업의 바깥에 있었다. 지시 시대에는 대상 데이터들이 수집, 정제, 가공되어 완전히 플랫폼 기업 내부로 흡수된다.

10월 15일 카카오 먹통 사태에서 보았듯이 거의 전 국민의 데이터가 민간 플랫폼 기업의 서비스에 예속되어 있다. 공공의 온라인 행정 역시 인증, 보안, 결제 등에서 민간 플랫폼과 연계되어 있다. 데이터는 나라의 공공재인데 데이터의 공공성과 안정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삼봉이 필요한 시간이다. 불같은 추진력으로 행정을 움직여 데이터를 공공재로 되돌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는 민간과는 별도로 공공 분야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공의 초거대 규모 인공지능'을 구축할 것이다.

삼봉은 지방정부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쌀과 채소 시장을 떠받치는 전남과 축산 과수 시장을 떠받치는 경북이 협력해 농식품의 인텔리전스를 구축하면 두 지자체는 한국의 '카길'이 될 것이다. 데이터를 가진 경북 농민은 서울의 중산층과 똑같은 수익을 누릴 것이다.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이인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