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아침] 정진석 비대위원장의 위험한 과거사 발언

입력 2022-10-18 17:40:19 수정 2022-10-18 19:09:48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의 미사일 도발은 멈출 줄 모른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함대가 동해에 들어오고 한미일은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합동훈련이 독도 부근에서 실시되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친일 국방'으로 매도하고 유사시 일본의 욱일기가 한반도에서 펄럭일지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이에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조선 왕조가 망한 건 썩어 문드러진 무능 무지 때문'이라는 주장도 하였다. 이 같은 주장은 언뜻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엄청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앞뒤를 절미한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이완용의 친일 발언과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 그의 발언은 일본의 식민 지배 책임을 일본보다는 조선왕조의 부패와 무능에 두었기 때문이다. 친일과 반일 프레임을 떠나 정 비대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여러 면에서 매우 위험하고 적절치 못한 발언이다.

몇 해 전 일본 명치유신의 본산 야마구치현 일대를 둘러본 적이 있다. 일본이 영웅시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송하학숙뿐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독의 고택도 들러 보았다. 일본은 부국강병을 위해 명치유신의 틀을 만들고 반도 침략을 위한 소위 정한(征韓)론까지 구체화하였다. 일본은 과거 명(明)을 정복하기 위해 길을 비켜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명분으로 조선을 두 번이나 침략하였다. 그것이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이번 정 비대위원장의 발언은 본래 의도야 어떻든 일본 우익의 식민사관과 일치한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조선 왕조의 무능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무능하고 무지한 나라는 식민 지배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인가.

이번 그의 발언은 일본 침략에 반대한 수많은 애국지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에도 역행한다. 조선은 일본과 전쟁한 적이 없고 스스로 망했다는 주장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 당시 무능한 고종이나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민영환 등 수많은 애국지사는 목숨을 걸었다. 한일 합방을 전후해 왕산 허위 등 수많은 항일 의병 투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본의 국권 침탈 후에도 대구 앞산 안일사에서는 국권회복단이 결성되었고, 달성공원에서 창립된 최초의 항일 무장투쟁 조직 광복회는 친일 분자를 척결하였다. 그의 주장은 안중근 의사나 상해 임정의 파란만장한 역사마저 훼손시킬 수 있다. 정 비대위원장은 일본 침략의 원인으로 왕조의 무능보다는 일제의 침략 부당성부터 지적했어야 옳을 것이다.

한일 간에는 아직도 과거사 문제로 외교적 현안 타결이 무척 어렵다. 그간 군국주의자 아베 총리의 그릇된 역사 인식이 한일 간의 화해를 어렵게 한 결과이다. 일본은 여전히 과거에 대한 한 치의 반성도 사과도 없다. 일본은 아직도 종군위안부도 솔직히 인정치 않고 책임만 회피하고 있다. 일본에 강제징용을 갔던 조선인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일본은 우리의 영토인 독도마저 자기네 영토라고 교과서에 등재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 극우 정권은 헌법 개정을 통해 군사 대국화를 획책하고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고 있다. 한일 관계가 이토록 복잡한 시점에서 정 비대위원장의 발언은 한일 간 현안 타결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 의원연맹 회장인 그의 이번 발언은 우리의 대일 협상력만 약화시킬 뿐이다.

북한의 도발이 심상치 않은 시점에서 한일 안보 협력은 용인될 수도 있다. 한일 간의 친선과 화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실증사관을 가장한 보수 우익 인사들의 식민사관이 문제 해결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민족적·자주적 외교 노선을 더욱 견지해야 한다. 우리 경제의 위상도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2020년 우리나라 1인당 GDP 수준이 4만3천 달러나 돼 일본을 능가하였다. 미국 와튼 스쿨의 공동 조사를 보면 2022년 세계의 국력 순위에서 한국은 8위 일본을 제치고 6위가 되었다. 우리도 이제 과거의 대일 열등 의식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당당하게 대일 외교 협상에 나서야 한다. 정 비대위원장의 과거사 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