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 꿰찬 바이킹…후손인 노르망디 공작이 현 영국 왕실의 시조 돼
엘리자베스 1세 후 튜더왕조 끊기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위 상속
독일 출신 조지 1세 즉위 후 하노버 왕조 시작…1차 대전 후 윈저 왕조로 이름 바뀌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생을 접었다. 1926년생이니 우리나이로 97세다.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왕위에 올랐다. 70년 동안 왕좌를 지켰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를 읊었다. 일흔 살 살기도 드문 일인데, 70년간 왕의 자리에 있었으니...
전세계 45개 영연방 구성국가를 비롯해 각국 대통령이나 정부 수반이 모여 여왕의 영면을 빌었다. 영국은 왕정국가다. 독특하다. 유럽대륙의 경쟁 강대국이던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왕정이 모두 붕괴됐다. 굳건하게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영국 왕실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엘리자베스 2세의 서거 국면에 맞춰 영국 왕실의 역사를 들춰 본다.
◆바이킹 1066년 영국 정복
프랑스와 영국을 가르는 해협을 영국에서는 도버해협, 프랑스에서는 깔레 해협이라 부른다. 도버는 프랑스에서 가장 가까운 영국 항구, 깔레는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항구다. 도버성에 오르면 해협 건너로 깔레가 보인다. 역시 깔레에서도 바다 건너 도버가 보인다. 도버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 헤이스팅스라는 해안 도시가 나온다.

여기서 수도 런던 방향으로 11km 지점에 배틀(Battle)이라는 도시가 나온다. 인구 7천 명 남짓이니 우리로 치면 면소재지 정도다. 고풍스러운 수도원이 자리해 적지 않은 탐방객들이 찾는다. 수도원이 크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배틀 수도원. 그 이름에 답이 들었다. 배틀(Battle) 전투. 어떤 전투가 펼쳐졌을까?
10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틀과 헤이스팅스 바다 건너 땅이 프랑스(당시 서프랑크) 노르망디다. 프랑스어로 노르(Nord, 북쪽) 사람들의 땅이다. 덴마크 일대에 살며 배를 타고 각지로 장사를 하러 다니던 민족을 바이킹(Viking)이라 부른다. 해안선을 따라 내려오던 바이킹 일파가 아름다운 강을 만나 거슬러 올라갔다. 프랑스 세느강이요, 빠리가 나타났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 바이킹의 방문(?)에 시달리던 프랑스는 결단을 내렸다.

세느강 하류의 땅을 떼줄 테니, 제발 파리로 올라와 노략질하지 말라는 읍소였다. 세습 공작 칭호도 내렸다. 덩치 큰 바이킹, 너무 커서 탈 말이 없었다는 바이킹 롤로(Rollo)는 서프랑크 왕국의 공작이 되면서 노르망디를 꿰찼다. 911년이다. 롤로의 후손인 7대 노르망디 공작 기욤(Guillaume)이 1066년 영국으로 쳐들어갔다. 노르망디에서 바다 건너 상륙한 곳이 헤이스팅스다.
그의 부대는 11km 북쪽 지점에서 대항하던 앵글로 색슨계열 영국왕 해롤드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기욤은 영국왕에 올랐다. 영국에서 그를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으로 부른다. 현 영국 왕실의 시조다. 승리한 전투현장은 배틀(Battle) 이름표를 달고, 지금까지 탐방객을 맞는다.

◆영국 정복 담은 바이외 타피스리
정복왕 윌리엄이 런던에 남긴 유적은 템즈강 북단의 화이트 타워(White Tower)다. 로마 시대 성벽 옆에 건축된 이 성은 군사 요충이자 영국 통치의 거점이었다. 윌리엄은 비록 영국왕이 됐지만, 고향 땅 노르망디에 묻혔다. 노르망디로 가보자. 2차 세계 대전 기간중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잘 알려진 노르망디는 세느강 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다.
그 중심지가 캉(Caen)이다. 하지만, 탐방객들은 그의 무덤이 있는 캉보다 북서쪽 30여 km 지점의 소도시 바이외(Bayeux)를 더 많이 찾는다. 이곳에 진귀한 보물이 보관돼 있다. 1066년 바이킹의 영국 침략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바이외 타피스리(Tapisserie de Bayeux)다.
타피스리는 천으로 만든 장식용 휘장이다. 바이외 타피스리는 폭 50cm에 길이 70m다. 여기에 노르망디 바이킹들이 1066년 나무를 베 배를 만들고, 영국에 상륙해 전투를 치르고 승리 연회를 여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윌리엄부터 죽은 영국왕 해롤드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 58장면에 바이킹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유물은 정복 몇 년 뒤 영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왜 이 유물이 바이외에 있을까?
이를 제작한 인물은 윌리엄의 동생인 오도(Odo)다. 오도는 윌리엄과 아버지가 다른 동복 동생이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동생을 1049년 바이외 주교로 임명했다. 비록 주교였지만, 오도는 최고의 바이킹 전사요, 행정가였다. 영국 왕실과 노르망디 공작령의 권력서열 2인자이던 오도가 영국정복이라는 기념비적 사건을 바이외 타피스리에 담았고, 자신의 거점인 바이외로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스코틀랜드 왕이 영국왕으로
윌리엄이 대략 1만여명 안팎의 군사로 영국을 정복한 이후 특이한 역사가 전개됐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왕의 신하인 노르망디 공작이 영국의 왕이 됐으니 말이다. 윌리엄이 영국에 문을 연 왕조를 노르만 왕조(1066-1141)라고 부른다. 이 노르만 왕조에 이어 헨리 플랜태저닛 왕조(1154-1399)가 영국에서 이어진다.
이름만 바뀌었을뿐 윌리엄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왕조다. 헨리 플랜태저닛 왕조가 랭카스터와 요크 왕가로 나뉘고 두 왕가가 장미전쟁을 치른다. 이어 승리한 랭카스터 가문이 튜더왕조(1485-1603)를 열었다. 혈통으로는 윌리엄의 후손이다.
튜더왕조의 왕으로 이름 높은 이가 이혼문제로 로마 가톨릭에서 영국 기독교를 분리시킨 헨리 8세다. 그의 딸이 엘리자베스 1세다. 결혼하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1세가 1603년 세상을 떠났다. 후임 영국왕은 누가 됐을까? 튜더 왕조의 직계 적손이 끊겼다. 대신 엘리자베스 1세의 고모. 그러니까 헨리 8세의 누나 마가렛 튜더가 스코틀랜드 왕실로 시잡 가 얻은 손녀딸 메리의 아들 제임스가 영국 왕위를 상속받았다.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영국왕 제임스 1세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독일인 영국왕
제임스 1세에서 시작된 스튜어트 왕조(1603-1714)는 제임스 1세의 증손녀 앤여왕이 1714년 적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며 막을 내렸다. 왕위는 제임스 1세의 손녀이자 앤여왕의 왕고모인 소피아의 아들 조지 1세로 넘어갔다. 죽은 앤 여왕의 5살 위 6촌 오빠다. 조지 1세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어찌 된 영문인가? 소피아가 독일 하노버 선제후(選帝侯)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해 낳은 큰 아들이다. 선제후는 독일어권 국가들 연합체인 신성로마 황제를 선출하는 제후다. 영국 왕실 이름은 하노버 왕조로 바뀌었다. 조지 1세는 영국왕이자 독일 하노버 선제후 지위를 유지하며 양국의 영토를 소유했다.
앤여왕이 50살로 죽을 때 이복 남동생이 있었다. 아버지 제임스 2세가 두 번째 왕비 모데나에게 얻은 왕자다. 갓난 아이여서 계승하지 못했나? 27살의 장성한 성인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영국은 신구교간 처절한 갈등을 겪었다. 1688년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민주주의를 확보한 영국 의회는 1701년 왕위 계승법(Act of Settlement)을 통과시켰다.
앤여왕의 후손이 없을 때 가장 가까운 신교도 친척이 후임 영국왕이 된다는 법안이다. 종교 화합을 위한 조치였다. 앤 여왕의 이복 남동생 스튜어트는 가톨릭신자였다. 신교도 독일인 조지 1세가 영국왕이 된 사연이다. 조지 1세는 영국왕실의 시조 윌리엄이 노르망디에 묻힌 것처럼 고향 하노버에 묻혔다.
하노버 왕조의 조지 5세 시절 1914년 독일과 1차세계 대전이 터졌다. 영국 국민의 대독일 이미지가 나빠졌다. 이에 영국 왕실은 하노버 왕조에서 윈저 왕조로 이름을 바꿨다. 왕조 문패를 바꿔 단 조지 5세의 손녀가 70년 왕위에 머물다 이번에 죽은 엘리자베스 2세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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