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만 되면 점괘 의존…주술 대한민국은 여전하다
얼마 전, 지난 봄 치러진 지방선거에 도전했다가 낙마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은 한국의 엘리트 코스 학력에 빛나고, 외국 유수의 명문 대학 유학을 다녀왔으며 행정고시에 패스하여 정부 조직의 차관급을 역임한 분이다.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을 지방 발전에 보태겠다는 포부로 지방선거에 출마했다가 낙마한 것이다.
그는 공천을 누가 받느니 하며 회오리가 일자 용하다고 소문 난 역술인 집을 찾아 몇 차례 점을 쳤다고 한다. 이 분 뿐만 아니라 유명 정치인들 중에는 전속 역술인까지 두고 정치적 운세를 조언 받는 사례가 전설처럼 떠돌고 있다. 비단 정치인뿐만 아니라 기업인은 물론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사주역학이나 관상, 풍수지리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한국인들의 역술 의존 현상은 가히 '필사적'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4년 전인 2018년,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37억 달러에 달하는 한국의 점술 시장'이란 흥미로운 기사를 보도했다(2018년 2월 24일자).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4조 원이 점을 치거나 무당굿, 관상을 보거나 명당길지를 잡아주는 사례비로 지출되었다는 것이다. 2017년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무당 단체인 대한경신연합회와 역술인 단체인 한국역술인협회의 가입 회원이 약 30만 명, 비회원까지 추산하면 50만 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약간 과장된 수치로 보인다. 통계청의 통계에 의하면 2016년 '점술 및 유사 서비스업' 사업체 수는 1만 2,39개, 종사자 수는 1만 1천585명, 매출액 2천43억6천700만 원으로 조사되었다.
어쨌거나 한국인들의 못 말리는 주술·풍수 의존 현상의 뿌리는 깊다. 조선 시대에도 이런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 양반 관료들은 무당이나 박수를 '저급한 사교(邪敎)'로 몰아 도성에서 쫓아냈지만, 사실은 그들을 고마운 존재로 여겼다. 왜냐하면 무녀세(巫女稅)란 세금을 징수하는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무녀세는 그 규모와 액수 면에서 다른 어느 잡세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다. 중앙정부는 무당이나 박수에게 거둬들인 무녀세로 예조(禮曹, 외교부와 교육부) 소속 하급 직원의 급료를 충당했고, 지방정부에서는 흉년이 들었을 때 구휼 자금이나 군사 관련 예산으로 요긴하게 사용했다.
문제는 국왕과 왕비가 그 누구보다 미신을 맹신하여 무당이나 역술인을 가까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의 운명을 가름하는 국가대사를 주술에 의존했다는 뜻이다. 민 왕후의 주술 의존 현상은 고종에게 시집을 와서 출산한 자식들이 선천적 기형, 질병으로 태어나자마자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얻은 왕자 이척(후에 순종)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다. 고종 부부는 왕자의 무병장수를 위해 필사적으로 미신에 매달린 결과 구중궁궐에서 푸닥거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용하다는 무당의 신탁을 받아 왕자의 건강을 빌기 위해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비단 한 필, 돈 1,000냥씩을 바쳤으며, 매일같이 용왕에게 먹이기 위해 백미 500석으로 쌀밥을 지어 한강에 뿌렸다(배상열,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추수밭, 2017, 65쪽).
더욱 희한한 일은 민 왕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장호원에 숨어 사는 과정에서 한 무당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무당은 왕비의 환궁 날짜를 예언했는데, 신통하게 그것이 적중하자 군란이 진압되어 환궁할 때 민 왕후는 무당을 데려와 왕궁에서 함께 살았다.
어느 날 무당이 "나는 관우의 딸이니 신당을 지어 정성껏 받들라"고 주술하자 고종은 7종 천민으로 분류된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에 봉하고, 노론의 거두 송시열 집터에 북관왕묘란 사당을 지어 바쳤다. 여성이 군호를 받은 것은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왕비가 무당 진령군을 "언니"라 부르며 끔찍하게 섬겼다고 전한다. 진령군은 국왕 부부에게 금은보화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하사받았다. 밤에 무당이 고종과 왕비에게 한 말은 다음날 어명으로 내려왔고, 신탁을 빙자하여 인사에 개입했다. 이른바 조선시대 판 국정 농단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국왕 부부가 무당에게 놀아나는 꼴을 보다 못한 사간원 정언(正言) 안효재가 1893년 7월, "민 왕후의 총애를 받아 세도를 부리고 국정에 간섭하는 요망한 무당을 목 베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진령군을 목 베는 대신 그녀를 비난한 안효재를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 보냈다.
고종과 민 왕후는 진령군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고 할 정도로 미신에 미쳐 있었다. 왕비가 무속에 빠진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풍조로 볼 때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고 치자. 하지만 국왕마저 무당에게 농락당하면 그의 통치는 무당·역술가의 점괘에 의한 주술 통치가 된다. 불행하게도 고종 시대에 실제로 그런 일이 무시로 일어났음을 윤치호는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몇 해 전 무당들이 환궁(아관파천에서 덕수궁으로 돌아온 일)해서 득세할 때 상감께서 무당 앞에 엎드린 것을 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중략) 어느 날 저녁 무당이 마른 참나무 가지를 왕의 머리 위에 흔들면서 춤을 추다가 "나는 태조대왕이다. 네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누구 덕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상감마마는 그 무당이 실재로 그의 조상인양 엎드려 큰절을 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상궁에게 명하여 선왕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물론 무당은 태조의 이름으로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제공하라고 명하였는데, 많은 양의 돈과 비단을 주라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일은 폐하께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아직 흠뻑 빠져 계신다는 점이다.'(국사편찬위원회 편, 『윤치호일기』, 제5권, 1898년 5월 6일, 156~157쪽).
이런 낯부끄러운 일이 벌어진 1898년은 독일이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 일대를 조차하고, 러시아가 랴오둥(遼東)반도를 차지하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운명을 놓고 '동아시아 위기'가 발생한 해다. 국내에서는 고종이 각종 이권을 헐값에 외국에 넘기자 독립협회가 의회 설립운동을 일으켜 민의가 반영되는 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기에 국왕이 주술통치로 날을 지새웠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21세기 문명사회의 첨단을 달리는 선진 한국에서 때만 되면 정치인·경제인 등이 용하다는 역술인과 풍수가, 무당을 찾아 점괘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망국으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것 아닌가.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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