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칩과 동전

입력 2022-08-26 13:15:21 수정 2022-08-29 08:03:23

이선욱 시인, 대구문학관 상주작가

이선욱 시인, 대구문학관 상주작가
이선욱 시인, 대구문학관 상주작가

'포커'에 한창 빠진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거나 도박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대학 시절 친구들끼리 모여서 포커를 치는 그 자체가 좋았던 때가 있었다. 장소는 주로 자취방. 장소도 장소지만, 실은 다들 실력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애초부터 그럴싸한 판은 불가능했다. 그저 라면을 먹던 밥상 위에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채로 새벽까지 포커를 치던 시절이었다. 아무렴 어떨까. 그렇게만 놀아도 즐거운 시절이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판돈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게 포커의 핵심이기도 했으니까. 처음엔 재미삼아 주머니에 있는 잔돈으로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포커를 치면 칠수록 결국 각자의 안타까운 주머니 사정만 확인하는 꼴이 되곤 했다. 기분도 우울했거니와, 게임도 금방 끝날 따름이었다. 그래도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무슨 카지노 마냥 '칩'을 잔뜩 쌓아놓고 게임을 했으면 했다. 딱히 그걸 마련할 방법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하여 고작 아이디어라고 생각해낸 게 할머니들이 치던 '점당 10원짜리' 고스톱에서 착안한 10원짜리 '칩'이었다. 물론 너무 없어 보인단 의견도 있었으나, 그럼 밥상머리에서 치는 포커는 있어 보이냔 말에 곧장 없던 의견이 됐다. 우리는 각자 방에 쌓아둔 동전을 한데 모으기로 했고, 이후로는 별도의 판돈 없이 모아둔 동전만으로 포커를 치기로 했다. 주머니 사정도 고려하고, 게임은 게임대로 즐기자는 취지였다. 당시만 해도 동전이 잘 쓰이던 시기였으니, 모으고 보니 엄청난 양이 쌓이긴 했다. 그때 따로 계산은 안 했는데, 생각해보니 서너 명이서 10원짜리로 대략 2만원 정도 모았던 것 같다. 칩만 2천 개였던 셈이다.

아무튼 그렇게 벌이기 시작한 판은 늘 수북한 '칩'으로 가득했고, 때로는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칩보다 외형만큼은 '금화'에 가까운 10원짜리가 우리의 포커를 더 실감나게 만들기도 했다. 아니, 게임을 이긴 사람이 수북한 동전을 양손으로 끌어당길 때마다 잠깐이나마 부자가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저녁이 밤이 되고, 밤이 새벽이 되고, 새벽이 아침이 돼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러다 급기야 한번은 꼬박 이틀 밤을 새워서 포커를 치기에 이르렀다. 2박 3일간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따라가서였다.

왜 거기까지 가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사흘째 아침을 맞을 무렵 우리는 다들 이상한 웃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몽롱한 정신 탓인지 자기 손에 좋은 패가 들어와도 그게 무슨 패인지를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다들 이상한 웃음이 터지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인지 그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건 우리가 치는 '포커'가 꼭 우리를 닮아있단 사실이었다. 그건 눈앞에 행운이 찾아와도 정작 그게 행운인지를 모르는, 지극히 궁상맞으면서도 그게 궁상인지 모르는, 그러면서도 그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마냥 즐겁기만 했던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금화' 모습을 했던 칩들이 다시 10원짜리 동전으로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후로는 그렇게 무언가에 빠져서 무작정 즐거웠던 마음들도 그 누런 동전들처럼 하나둘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