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국
누가 축국을 고운 난간 앞에 던져 놓았나
(誰拋蹴鞠畫欄前 수포축국화란전)
옥과 구슬을 꿰어 이어서 연기처럼 푸르네
(綴玉聯珠碧似烟 철옥련주벽사인)
들리는 말에 신령한 사자가 솜씨 좋게 갖고 놀았다던데
(聞說神獅工把弄 문설신사공파롱)
사람의 시상을 원만하게 일으키네
(惹人詩思一般圓 야인시사일반원)
스승인 추사 김정희에 대한 신의를 지켜 불후의 명작 「세한도」를 받은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시문집 『은송당집속집』(恩誦堂集續集)에 나오는 시 「수구화」(繡毬花)다. 푸른빛의 수국을 연기에 비유했다. '비단으로 수를 놓은 둥근 꽃'이라는 뜻의 수구화는 수국을 일컫는다. 수국은 모란이나 장미처럼 화려한 꽃이 아니라 고운 미소처럼 한 아름 피어서 고혹적인 아름다움을 물씬 풍긴다. '물을 좋아하는 국화'라는 뜻의 수국(水菊)이라는 이름은 수구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수국 꽃은 여름에 핀다. 우리가 보통 '수국'이라 부르는 개량종은 6월 초에 개화를 시작하며 품종에 따라 한여름 땡볕 아래서 계절의 정취를 한껏 더 꾸며준다. 꽃이 만발하는 시기가 장마와 겹치는 이유는 자라는데 많은 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학명에 일본인 이름이 들어간 사연
수국의 고향은 중국이고 기본종의 학명은 히드랑게아 마크로필라(Hydrangea macrophylla)다. 우리가 요즘 화단이나 화분에 심는 수국은 일본이나 유럽에서 개량된 원예품종이 대부분이다. 개량종 수국의 예쁜 꽃은 사실 작은 가짜꽃(무성화) 송이들이 모여 공 모양의 큰 꽃송이를 이룬다. 무성화는 생식기능이 없다. 이 때문에 씨앗이 안 생기고 꺾꽂이로만 번식된다. 한마디로 스스로 후손을 갖지 못하는 식물이다.

나무수국
종전의 수국 학명에 '오타크사(otaksa)'라는 사람 이름이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막부시대 일본에 머문 독일 출신 의사이자 식물학자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와 얽힌 사연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생물을 조사해 식물 표본을 유럽으로 갖고 가서 '일본식물지(日本植物誌)'를 간행하는 등 유럽에 일본학의 정립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수국을 몹시 좋아해서 일본에 살 때 현지처인 오타키의 이름을 반영한 '오타크사(otaksa)'를 학명에 넣어 'Hydrangea macrophylla for. otaksa'로 등록했다.
나중에 미국 하버드대학 아놀드수목원에서 먼저 등록한 'Hydrangea macrophylla for. normalis'와 같은 품종으로 밝혀져 지금은 '오타크사'가 들어간 학명은 일본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여인 오타키를 향한 독일 식물학자의 순정이 묻어나는 학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셈이다.
수국은 식물학적으로 종전에는 범의귀과로 분류됐지만 2016년에 속씨식물 계통연구 그룹(APG·Angiosperm Phylogeny Group)이 분자계통학 연구에 기반을 둔 네 번째 새 분류 체계에 따라 수국과 수국속으로 분류된다. 식물 분석 기술이 발달하여 이전과 다른 분류 기준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직 포털사이트나 식물원 팻말에는 범의귀과로 적혀 있다. 혹자는 '수국이 예쁘기만 하면 되지 분류가 무슨 큰일일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식물원에서는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야 마땅하다.
수국은 보통 키가 1m 정도 자라는 관목이다.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공처럼 만들어내는 개량·원예종 꽃무리는 색깔이 다양해서 많은 사람들이 선호한다. 토양의 산도(酸度·pH)에 따라 색상이 카멜레온처럼 변하는데 알칼리 성분이면 분홍색이 진해지고 산성이 강하면 푸른색을 띤다. 이런 꽃의 특성을 이용하여 토양에 첨가제를 넣어 꽃 색상을 인위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꽃말도 '변하기 쉬운 마음'이다.

산수국
◆우리 산골짝의 토종 수국들
종자 번식이 가능한 '토종 수국'의 꽃 모양은 가운데 몽글몽글한 진짜꽃(양성화)과 그 주위 가장자리를 꾸며주는 가짜꽃(무성화)으로 특이하게 구성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자연 상태에서 꽃도 피고 씨앗도 맺는 수국과 수국속 집안 식물들이 있는데 산수국, 탐라수국, 등수국(藤水菊)이 그 주인공이다.
'토종 수국'의 둥근 꽃차례 가운데는 꽃잎이 보이지 않지만 수분이 가능한 진짜꽃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상대적으로 큼직하고 눈에 잘 띄지만 수분이 불가능한 가짜꽃이 있다. 작고 촘촘한 진짜꽃을 그보다 좀 커다란 가짜꽃이 장식하는 모양새다.

등수국 울릉군 제공
가짜꽃으로 곤충들을 유혹하여 옆에 있는 진짜꽃의 수분을 돕는다. 꽃을 두 종류로 만드는 이유는 자잘한 진짜꽃을 모두 크게 만드는 것보다 가짜꽃 몇 개를 크게 만들고 진짜꽃을 작게 하는 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대구경북 산골짜기에서도 7월 무렵엔 소규모 군락을 이뤄 핀 산수국을 볼 수 있다.
바위수국과 등수국은 울릉도 등에서 서식하며 바위나 나무 줄기를 타고 높이 올라간다. 꽃 모양은 산수국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자세히 보면 무성화 꽃잎 조각이 산수국은 넉 장이고 바위수국은 달랑 한 장이다.
토종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원예종으로 개발된 나무수국은 7, 8월에 피는 우윳빛 꽃이 원추형 꽃차례를 이룬다. 대구 도심의 한 백화점 앞 화단에 활짝 핀 나무수국은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에게 백옥 같은 싱그러움을 선사한다. 노지에서 월동이 가능해서 국내에 많이 보급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화분이나 정원에 심는 떡갈잎수국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다락머리 나무 하나 다닥다닥 잎만 쳤지
一樹當樓葉亂抽(일수당루엽란추)
가지 끝에 붙어 있는 꽃망울은 전혀 없어
都無蓓蕾著枝頭(도무배뢰저지두)
정원지기가 지난해에 잘못 잘라버렸는데
前年枉被園丁斸(전년왕피원정촉)
꽃이 피어 그때 보니 그게 바로 수구였다네
待到花開是繡毬(대도화계시수구)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5권 「다산화사」(茶山花史) 20수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정원지기가 잘못해서 수국을 베어버렸는데 죽지 않고 올해 다시 싹이 났다. 무슨 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꽃이 피니 바로 수국을 알아보았다는 내용이다.
다산은 지금의 경북 포항시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전라남도 강진군으로 유배지를 옮겼는데 다산초당에 수국을 비롯한 많은 꽃과 나무를 심어놓고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문일평은 『하화만필』에서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수국의 결점을 지적했다. "수구가 꽃은 아름답지만 향기가 없는 것이 흠이다. 대저 꽃이 색과 미만 갖추고 향기가 없는 것은 마치 얼빠진 사람 같아서 원만한 아름다움이라고 말 할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수목원 수국 향연
대구수목원에는 수국만 별도로 있는 전시원이 넓지는 않다. 수국 '아미시스트' '그랜드플로라' '에버블루밍' '햄버거' '레드엠페러' '마리에시'와 나무수국 '플로리분다' 등의 이름표가 붙은 수국 꽃을 7월에 감상할 수 있다. 수국 마리에시는 자람이 어른 키를 넘을 정도다. 원색의 강열함보다 은은한 파스텔 톤의 색상이 갖는 수국의 매력을 감상하는 일은 더운 여름에 누리는 호사다.

바위수국 울릉군 제공
포항에 있는 경북수목원에도 다양한 수국이 여름 내내 자태를 뽐낸다. 삼미담(森未潭) 주변과 전시온실 앞에는 산수국이 올망졸망 피어 있다. 특히 수국으로 꾸며 놓은 화계(花階)에는 지난해 말라버린 꽃대가 아직도 남아 있지만 꽃이 만발하는 이달부터 여름 내내 장관을 이룰 것이다.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 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 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무더기로 쏟아지네
이해인 수녀의 시 「수국을 보며」는 나른한 여름에 수국 꽃 같은 둥근 미소를 짓게 만든다. 무더위에 지치고, 인심마저 점점 각박해지는 여름에 미소처럼 핀 수국 꽃을 보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기를 소망한다.
◆불두화와 수국 뭐가 다르나?
하얀 수국과 닮은 듯해서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꽃이 불두화(佛頭花)다. 불두화는 백당나무를 개량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개량종 수국처럼 무성화(無性花)다. 꽃의 모양이 곱슬곱슬한 불상 머리처럼 생겼고 부처가 태어난 음력 4월 초파일을 전후해 하얀 꽃이 풍성하게 만발하며 사찰의 정원수로 많이 심어져 불교와는 인연이 남다르다. 불두화는 개량종 수국과 비슷하나 나무 잎사귀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게 특징이다. 처음 꽃이 필 때 색상은 연초록색이나 활짝 피면 흰색이 되고 질 무렵엔 누런색으로 변한다.

불두화
불두화도 가짜꽃 부분만 키워 품종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종자번식을 못하고 꺾꽂이로 인공 번식 시킨다. 우리나라에 언제 어디서 들어왔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16세기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불두화의 원종으로 알려진 백당나무는 꽃차례가 산수국과 닮았다. 가운데 작은 유성화가 소복하고 둘레를 하얀 무성화가 둥글게 달린다. 다만 가짜꽃의 꽃잎 수가 수국은 넉 장이고 백당나무는 다섯 장이다.

백당나무
팔공산 산세가 진정 높은데
八公山勢正嵯峨(팔공산세정차아)
달빛 새는 남은 구름에 빗방울 어둡게 비끼네
月漏殘雲雨暗斜(월루잔운우암사)
취하여 장송에 기대었다가 떨어지는 눈에 놀랐는데
醉倚長松驚落雪(취의장송경락설)
술이 깬 뒤에 불두화를 바로 알았네
醒來知是佛頭花(성래지시불두화)
조선 중기 서지학의 기반을 닦은 안동 출신인 김휴(金烋)의 작품집 『경와선생문집』(敬窩先生文集)에 실린 「도리사기소견」(桃李寺記所見)이다. 칠언절구 세 수 가운데 마지막 수에 불두화가 등장한다. 도리사가 지금 구미에 있는 사찰을 가리키는지, 팔공산의 다른 사찰을 말하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벌써 불두화를 대번에 알아보는 선비의 각별한 안목이 돋보인다.
선임기자 chungham@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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