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일 경북대 행정대학원장
우리나라에는 기념일이 많다.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른 기념일이 53일, 여타 법령으로 정한 기념일은 69일이다. 푸른 하늘의 날, 흙의 날, 김치의 날이 있다. 여권통문의 날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인권선언문이 발표된 날이다. 세종대왕 탄신일인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지정했다고 한다. 교수는 스승인가. 교사와 달리 교수라는 단어에는 스승의 의미가 없다. '프로페서'(professor)의 어원(語源)도 대중 앞에서 말하는 사람, 즉 공언(公言)하는 사람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만이 공언할 수 있다. 전문가를 뜻하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프로페서와 어원이 같다.
교수는 전문가다. 전문가는 노동자다. 따라서 교수는 노동자다. 1200년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설립된 최초 대학교는 교수들로 구성된 조합이었다. 우리나라는 유교 근본주의로 인해 교수가 스승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노동자로서의 교수를 거부하는 정서가 강하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교수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헌법재판소는 "교수의 근로 조건이 교사에 비해 법적으로 강하게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기존 교수협의회는 대학교나 교육부와 교섭할 권한이 없다. 교수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단결권 보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2019년 서울대학교에 교수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올해 1월 단체협약이 체결됐다. 서울대학교 교수노동조합 가입률은 현재 약 30%다. 2020년 국립대학교로는 처음으로 경북대학교에 교수노동조합이 결성됐다.
깡패들은 말끝마다 의리를 강조한다. 의리가 없기 때문이다. 스승의 날을 정해서 '스승의 은혜'를 부르고 가슴에 꽃을 단다고 해서 교수와 학생 사이에 신뢰가 쌓이지 않는다. 교수와 학생의 신뢰 관계는 강의와 연구를 통해 사적(私的)으로 형성된다. 유교적인 사제(師弟) 관계가 계약을 바탕으로 한 교수와 학생 관계보다 두터운가. 나는 우리나라와 미국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학생 입장에서 두 나라 교수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아래에 인상 깊었던 미국 대학교에서의 경험을 소개한다.
유학 첫 학기 일이다. 수업 시작 10분 전 학내 카페에서 우연히 담당 교수를 만났다. 서로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는 내 커피값을 내주지 않았다. 그 교수는 계산대 줄에서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커피값은 75센트였다. 그때 나는 더치페이를 확실하게 경험했다. 학기 말에 그 교수가 내게 연구조교를 제안했다. 2년 동안 수업료와 월 1천200달러를 받고 주당 20시간 일하는 조건이었다. 내가 먼저 연구조교 자리를 부탁하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자신의 수업에서 좋은 학점을 받았기 때문에 일자리를 준다고 했다. 같이 일하는 동안 그는 딱 한 번 샌드위치를 샀다. 연구제안서 발표를 위한 출장 때였다. 샌드위치값은 5달러였다. 지금도 나는 그 교수의 나이를 모르지만 언제든지 연락하면 같이 일할 수 있는 사이다.
또 다른 경험은 유학 후 3년이 지났을 때 일이다. 당시 나는 어느 정도 영어가 된다고 생각해서 학과장에게 수업조교를 하겠다고 했다. 학과장은 내가 작성했던 자기소개서를 보여주면서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기소개서에는 입학이 된다면 장학금은 필요 없다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그때는 그냥 한 말이라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 달 후 학과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장학생으로 선정된 사실을 알려줬다. 나는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학과장은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아도 자격이 되면 받는다고 말했다.
안 될 일은 부탁해도 안 되고, 될 일은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계약이다. 계약 관계는 건조하고 냉랭하지만 상식적이고 공정하다. 교수와 학생 관계의 본질은 계약이다. 교수에게 수업권이, 학생에게는 학습권이 있다. 두 권리는 똑같이 중요하다. 교수는 강의와 연구를 해야 하고, 학생은 수업에 출석하고 시험을 쳐야 한다. 교수와 학생 쌍방이 권리를 잘 행사하고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때 진정한 사제 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비로소 교수는 노동자가 아닌 스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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