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갑’에게 감히 돌을 던지다

입력 2022-04-27 11:21:26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갑'이 제시한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우리는 '을'이 된다. 갑은 이윤을 추구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도구로 을을 채용한다. 갑이 제시한 조항들은 보이지 않는 구속력을 가진다. 이 종이 한 장이 뭐라고, 을은 매일 갑의 사회로 뛰어든다.

갑이 원하는 것은 을의 노동이다. 체결된 시간만큼 노동을 제공하는 일, 그것이 을의 몫이다. 그러나 갑은 을에게 마지막 진액까지 아낌없이 쥐어짜주기를 원한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강도를 높이며 을의 한계를 테스트한다. 을이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에 시달릴지언정, 갑의 목적은 오로지 이윤과 영리 뿐이다. 갑은 을의 목소리 따위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을은 어느새 건물 안, 갑의 사회에 속수무책으로 길들어진다. 군소리 없이 그저 순응하기만 바랄 뿐.

을은 갑이 지급하는 노동의 대가로 삶을 영위한다. 갑이 제공하는 임금은,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밥줄'을 볼모로 한다. 그러니 갑에게 을의 정서나 감정, 사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잘한다, 잘한다.' 격려를 가장한 주술을 걸어, 체결한 노동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자본이 축적된 갑의 주술은 쉽게 을을 무력화한다. 마음만 먹으면 밥줄을 끊을 수도 있으니 을은 갑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밥의 위력을 터득한 갑은, 을에게 더욱 거룩하고 충성스러운 노동을 요구한다. 때로는 그런 을의 심리를 이용해, 인간으로서 반드시 보장받아야 하는 기본권마저 지배하고 착취하려 든다. 경기가 어려워지자 갑은 더 노골적으로 을의 노동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의 사회'라고 믿었지만 '우리'를 가장한 '그들의 사회'가 된 지 오래다. 견디다 못해 떠나는 을의 눈에 남은 을들은, 어쩌면 갑의 행태에 눈 감는 무능한 을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느 날, 침묵하던 을이 목소리를 냈다. 갑이 준비된 시스템을 가동해 즉각 대응했다. 갑의 수하가 찾아와 변화를 시도하는 건 바보라며 모욕을 안겼다. 갑의 또 다른 수하들이 을을 불러 집단으로 비난하고 질타하며 조롱했다. 을은 '감히'라는 괘씸죄를 쓰고 햇빛 한 줌, 바람 한 줄 들지 않는 곳으로 옮겨졌다. 갑은 반란을 일으킨 을을, 다른 을들과 분리하여 동조를 막는 것이 시급했을 것이다. 눈치 빠른 을들은 더욱 납작하게 엎드려 충성을 맹세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눈빛을 꺾었다.

"밥은 먹었어요? 을." "힘내요, 을." "응원해요, 을." 갑의 눈을 피해 을이 을을 위로하고 응원했다. 을이 다시 일어났다. 착취당한 권리를 되찾고자 깃발을 꽂았다. '근로기준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갑에게, 을의 질문 따위는 어쩌면 비천한 신분을 망각한 '반란'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갑은, 똑똑한 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갑의 위법함도 적법으로 위장하고, 악행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추켜세워 칭송해 줄 그런 을이 필요했을 것이다. 때로는 갑의 위험에 불같이 일어나, 대신 제 한 몸 아낌없이 내던져 줄 충성심 강한 을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갑에게 묻는다. 존중받고 싶은가, 군림하고 싶은가. 존중받고 싶다면, 당신의 프레임부터 적법하고 정직하게 다시 짜기를 바란다. 세상의 빛 운운하며 뒤로는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행위를 당장 멈추라. 을에게 당부한다. 갑의 사회에 밥줄을 저당 잡힌 채 꾸역꾸역 일만 하다 죽을 것인가. 갑은 언제고 우릴 내동댕이칠 준비가 돼있다. 이곳은 절대 삶의 전부가 아니니 눈빛 꺾지 마라. 위법을 저지르고도 일말의 양심도 없는 갑에게, 오늘도 을은 감히 돌을 던진다. 최소한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당신이 내게 저지른 죄는 정당하게 미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