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혁 소설가
몇 년 전 신학기를 앞두고 모 대학의 워크숍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한 교수님이 만든 강의 자료에 허준과 그의 스승인 유의태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자료는 두 인물의 활약상과 사제 간의 끈끈한 정,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위한 두 사람의 희생정신 등이 주요한 내용으로 다뤄졌다. 그 교수님이 맡은 강좌가 역사에 관련된 교양 강좌임을 생각할 때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 강의 자료는 잘못 만들어진 것이었다.
대부분의 역사물은 과거의 실제 사건이나 인물에 허구를 덧붙여 만든 '팩션형(faction= fact+fiction)' 작품들이 많다. 또한 허구를 덧붙이는 것에 상관없이 소설이나 드라마의 장르로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허구로 읽어야만 한다. 그래서일까, 역사적 사실을 다룬 드라마가 시작할 때면 '본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등은 실제 하지 않으며 허구임을 밝혀…'라는 문구가 마치 규칙처럼 화면을 채운다.
앞서 말한 허준과 유의태의 관계 역시 이 팩션에 해당한다. 드라마로 수차례 방영되면서 유명해진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 작가 이은성이 쓴 '소설 동의보감'에서 시작됐다. 작품에는 '허준'이라는 서자 출신의 한 인물이 당대 명의로 소문난 '유의태'라는 스승을 만나 의술을 전수받고 명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실제 허준과 유의태의 관계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완벽한 허구다. 인물의 이름 역시도 조금은 다르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는 유의태라고 돼있지만 그와 비슷한 이름으로 조선의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는 의원(醫員)의 이름은 유이태(劉以泰)이다. 그는 경상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원이었는데 의술과 덕망이 뛰어났다고 문헌에 기록돼있고 의술에 관련된 그의 저서도 몇 권 전해진다. 더 놀라운 사실은 실제 유이태는 허준보다 약 100년이나 뒤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유이태는 1652년에 태어나 1715년 사망했고, 허준은 1539년에 태어나 1615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실제 두 사람은 사제의 연은 고사하고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인물이다. 허준이 살아 있을 당시 이런 소문이 퍼졌다면 아마 요즘 흔히 말하는 가짜뉴스로 판명받아 소문의 장본인이 큰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까?
이야기(story)라는 범주는 전파하는 사람에게 활용이나 변용, 왜곡 등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입과 귀 그리고 글을 통해 전해지고 다시 전달될수록 더 흥미롭게 가공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소설창작론 강의실에서 유이태가 유의태가 되고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사제 간의 연으로 엮이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역사 수업에서 변용과 왜곡이 생겨나서는 곤란하다. 역사, 즉 'hi-story'는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공식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날 워크숍에서 그 강의 자료는 어떻게 됐냐고? 그건 오늘 글의 주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므로 비밀이다. 또 이야기의 극적인 결말을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아끼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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