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소설가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나에게 깜짝 놀라 여러 번 확인했던 질문이 있었다. "너 김신조 몰라? 정말로 김신조가 누군지 몰라?" 나는 정말로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를 모른다고 고개를 저으면 어른들은 긴 탄식을 내뿜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김신조를 알게 되었다.
김신조는 1968년 북한에서 내려와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31인 무장 공작원 그룹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내가 태어나기 4년 전의 일이었으니, 나는 그를 모르는 게 당연했는데도 어른들은 내가 그를 모른다고 할 때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고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장탄식을 내뿜었다.
그때 탄식하던 어른들의 심정을 이제 나도 안다. 내 딸을 포함한 젊은 세대가 이웅평, 황영조, 하다못해 아기 공룡 둘리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옛 어른들처럼 놀라며 긴 한숨을 내뿜었다. 그 한숨은 세월의 빠름에 놀라고 세상사의 무상함에 굴복하는 의미였다.
요즘 인기를 끄는 소년범에 대한 법정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잊힌 인물들 중 하나인 신창원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신창원을 안다면 당신은 옛날 사람이다. 1997년 신출귀몰한 탈주범으로 세간에 이름을 떠들썩하게 알렸을 때 신창원은 물론 소년범이 아니었다. 2년 넘게 도피 생활을 계속한 끝에 눈에 띄게 알록달록한 쫄쫄이 티셔츠를 입고 체포되어 사나운 표정으로 끌려갔던 그는 이십 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를 인터뷰한 어느 기사에서 그는 소년 시절의 어린 마음을 외쳤다. "내가 어릴 때 단 한 번이라도 '너 착한 놈인 거 안다'고 말해 준 사람이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린 목소리는 가시처럼 내 마음에 콕 박혀 오늘까지 잊히지 않고 있다.
심한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더라도,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말썽꾼'이라는 평판을 얻은 아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나쁜 소문이 자자한 어느 아이를 만났을 때 나는 그 아이가 조심스럽고 참하게 행동하는 것에 내심 놀랐다. 그가 착해 보이더라고 말하자 내 아이는 엄마의 순진함에 넌더리를 쳤다. "어른들 있을 때는 착한 척하는 거지. 우리끼리 있을 때는 다르다고. 엄마는 참."
그럴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지어 보인 말간 얼굴에 속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신창원을 떠올렸다. 초·중학교 시절의 신창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돌봄 받지 않은 외모에 이미 여러 차례 사고를 친 전력,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미 구제불능이라는 평판이 자자했을 것이다. 눈빛은 사나울 대로 사나워, 어른들조차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말은 '너 착한 놈인 거 안다'는 한마디였다.
인간은 때로 믿을 수 없이 부조리하다. 신창원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면서 너는 착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다 하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를 기다리기도 한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고뭉치에게 "네 마음속 깊은 곳에 선함이 있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의 덕담을 가볍게 비웃고 그날 밤 또 다른 사고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신창원의 소망은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보통 사람의 내면에는 선함과 악함의 씨앗이 모두 숨어 있다. 씨앗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두드림이 필요하다. 겨우 한 번 스친 빗방울은 씨앗을 틔우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나와 한 번 스친 일은 누군가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기엔 너무 하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보낸 시선,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빗방울이 되어 그의 인생 밭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빗방울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처음 보는 식물의 새 잎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어느 쪽 씨앗에 더 충분한 양분이 공급돼 싹이 트느냐에 따라 그 밭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어느 씨앗을 깨우는 빗방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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