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묵묵히 고향을 지켜며 자식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셨지요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는데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앨범을 뒤적이며 아버지를 만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자라면서도 저에게 아버지는 먼듯 어려운 듯 하여 늘 조심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성격은 경상도 어른의 모습으로 기억됩니다. 엄격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엄격함 속에는 따뜻함이 꽉 차 있었습니다. 간결한 말씀 뒤에 담긴 속 깊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야단치시는 모습의 속내에는 어른께서 감내하셨던 아픔과 한숨과 걱정의 시간이 있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둔한 저는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어쩌면 아직도 그 깊이를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했기에 노년의 아버지를 많이 외롭게 해 드렸습니다. 가끔 자식들 얼굴 보고 목소리나마 들으셨겠지만, 아침저녁으로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는 날들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늘 쌓인 일에 쫓기는 일상이 자식의 처지였지만, 그래도 어른의 쓸쓸함과 허전함에 대해 함께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후회됩니다.
아버지를 고향 선산에 모시던 날을 기억합니다. 볕이 종일 내리쬐는 따뜻한 자리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윗대 조상들 아래에 자리를 잡으셨으니 저도 한결 마음이 편했습니다. 10대에 당신의 어머니를 여의신 아버지께선 몹시도 고된 삶이었습니다. 어른 모시느라, 8남매 먹이고 입히시느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시간이 없었겠죠.
평생 고향을 떠난 적 없이 태어난 동네에서 노년까지 지내셨습니다. 자식들이 하나하나 집을 떠나 도시로 가고, 한 둘 씩 짝을 찾아서 가정을 꾸리고, 손자 손녀들이 혼인 인사를 오는 날까지도 묵묵하게 고향을 지키셨습니다. 그 덕에 저에게도 누나들에게도 언제나 아버지가 계신 곳, 고향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힘이 들 때 마음으로 의지할 곳이 있고, 세상이 만만하지 않음을 느끼는 날에도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이 든든했습니다. 그 언덕을 지키며 자식들을 위해 쌓으신 아버지의 산이 점점 높아 가고, 그 산을 쌓는 아버지의 손이 점점 거칠어 지는 것을 그 때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됩니다.
아마도 아버지께서 꿈꾸던 삶이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만 '꿈'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버지에겐 딸린 혹들이 줄줄이 있었으니, 당신 뜻대로 하지 못하셨겠죠.오랜 기간 묵묵하게 참고 견디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셨겠죠. '다음'이라는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하셨겠죠.
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 얼마동안이나마 병원을 오가실 때, 아버지와 보낸 시간, 말씀을 나눈 기회가 제 평생에 가장 많은 시간이었습니다. 진작 좀 그렇게 못한 것이 매일매일 후회되고 죄스러웠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라 좋았습니다. 저에게 의지하시는 아버지 모습이 때론 낯설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곁에 있는 시간이라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직도 그 날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렇게 서둘러 가시는 것도 한편으론 "참 아버지 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고 애쓰셨던 아버지께선, 혹시라도 아들에게 짐이 된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그 길을 원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인명은 재천이라지만 아버지 떠나시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 참 그립습니다. 저는 서른이 넘을 때까지도 아버지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나도 틀림 없는 아버지 아들이다." 아버지께 살갑게 굴지 못한 것, 더 자주 "아부지"라고 부르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습니다. "사랑합니더. 아부지"라고 아버지 생전에 하지 못한 것, 오늘 말씀 올립니다.


◆매일신문이 유명을 달리하신 지역 사회의 가족들을 위한 추모관 [그립습니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의 귀중한 사연을 전하실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서를 작성하시거나 연락처로 담당 기자에게 연락주시면 됩니다.
▷전화: 053-251-1580
▷이메일: lhsskf@imaeil.com
▷추모관 연재물 페이지 : http://naver.me/5Hvc7n3P
▷사연 신청 주소: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원장 탄핵 절차 돌입"…민주 초선들 "사법 쿠데타"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