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착한 척을 하자

입력 2022-01-12 10:23:21

이근자 소설가

이근자 소설가
이근자 소설가

철학에서는 사람의 본성을 크게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로 나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무선악설이 맞지 않을까 생각하는 쪽이다. 물론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 저렇게 주장한다고 말할 만큼 뭘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평소 아이들에게 "세상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다"고 말하는 것을 조금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사람은 똑같이 하얀 백지로 태어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식별할 수 없는 정도의 옅은 색은 본래 지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같은 환경에서도 저렇듯 다르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런 말은 나의 아주 사소한 의견이니 무시하고, 대(大) 사상가들의 이론으로 돌아가자.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인 고자(告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성이 선과 불선(不善)으로 나뉘어 있지 않은데, 이는 마치 물이 동서로 나뉘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인간은 다만 교육하고 수양하기 나름이며 수행의 과정에 의해 그 어느 품성으로도 될 수 있다."

칸트는 "도덕상의 선악은 인간 개개인의 이성과 의지에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으며, "환경의 영향으로 선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고 말한 이도 있다.

환경에는 아주 개인적이고 미세한 차이인 부모님의 편애나 트라우마의 농도와 횟수까지 포함될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와 같이 훌륭한 경구들은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실천이 문제다.

나 같은 일반인이 성현이나 위대한 인물을 따라할 수는 없다. 아니, 조금 흉내내려는 것도 너무나 힘겹다. 나의 감정은 어둠의 깊이를 모른 채 날뛰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가지려는 못된 욕망으로 향하는 거칠고 힘센 본능에 휘둘려 자꾸만 의지의 방향을 놓치게 된다. 내 의지라고 해봐야 자전거머리와 같이 연약하다. 그런데 그조차도 잘 제어하지 못한다. 색다른 풍경과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게으른 것에 탐닉하는 날이 많았다.

이런 회환과 같은 심리적인 턱. 그렇다. 자전거를 넘어뜨리는 것은 작은 돌멩이와 낮은 턱이 아니던가. 그렇게 하찮은 것도 피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여겨지는 날이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또 다시 결심을 한다. 그래, 착하게 사는 건 어려우니 착한 척이라도 하자. 누가 알겠는가. 그 연습을 백 년 정도 계속한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착해질지.

누군가 그게 위선처럼 보인다고 말하면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 말이 맞으니. 차라리 그의 예리함에 박수를 보내자. 위선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착한 말을 건넨다면 높이 쳐주자. 혹시 아는가. 나의 위선인 칭찬으로 그의 내일이 조금 더 나아질지 말이다.

오욕의 늪에 빠져 허덕이다 문득 멈칫하는 심리적인 브레이크가 작동하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노상 휘청대는 자전거머리를 멈출 수 있다면 더 좋다. 그런 날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크기를 감상하자. 오늘은 한 번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