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의 새콤달콤 과학 레시피] ‘성공’과 맞닿은 ‘실패’

입력 2021-12-27 14:06:41 수정 2021-12-27 19:21:14

덜 붙는 접착제→포스트잇, 부작용 치료제→비아그라

발기부전치료제

'실패'해도 괜찮을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산다. 사업의 실패, 일의 실패, 시험의 실패, 프로젝트의 실패 등등.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성공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 과학기술 분야는 '실패'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어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던 실패가 다음 성공을 위한 소중한 자산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왜 '실패'를 주목해서 봐야 할까? 이제 '실패'를 둘러싸고 어떤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현장을 들여다 보자.

◆'실패'를 보는 또다른 관점

실패를 주제로 한 박람회가 있다. 행정안전부와 중소벤처기업부가 주최한 '2018 실패 박람회'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국립과천과학관이 '과학의 실패'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에서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것과 연금술을 통한 화학의 발전 등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과학의 실패와 그 실패의 극복 과정을 전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전시회를 열었던 국립과천과학관이 대통령 표창을 2019년에 받았다.

사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수 많은 실패들의 연속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실패를 딛고 일어나 목표를 이룬 성공이 빛나고 있다. 그러니까 과학에 있어 실패와 성공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또한 우리 일상생활에 사용되고 있는 유명한 발명품들을 봐도 실패에 관한 다른 관점을 생각해보게 된다. 올해 5월에 화학자 스펜서 실버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포스트잇'을 발명한 사람이다. 1968년 미국 3M에서 그는 항공기 제작에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접착제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만든 것은 접착력이 약했다. 그런데 1974년 그의 동료 아서 프라이의 도움으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데에 그 접착제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20세가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포스트잇이 탄생했다. 그가 만든 접착제는 항공기 제작에 쓸 수 없는 실패작이었지만 포스트잇을 만드는 완벽한 접착제였던 것이다.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의 실패 스토리도 흥미롭다. 화이자는 협심증 치료제를 개발하던 중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을 진행했는데 치료효과가 좋지 않아 실패했다. 그런데 일부 임상시험 참가자들이 특이한 부작용을 겪은 것을 발견하고 발기부전 치료제 개발로 방향을 바꾸었다. 결국 화이자는 협심증 치료제 개발은 실패했지만 발기부전 치료제 개발에 성공해서 1998년 허가를 받아 대박났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비아그라'가 탄생했다. 이외에도 성공한 발명품 뒤에는 수 많은 실패들이 숨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발기부전치료제

◆연구개발, 실패해도 괜찮을까?

연구개발(R&D)은 어렵다. 세상에 누구도 해결방안을 내놓지 않은 문제를 잡아서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연구이니 당연히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업과 경제 발전을 위해 연구개발은 무척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세계 1위의 연구개발비를 쓰고 있으며 올 한 해 사용한 국가 연구개발비가 27조 2천억원이나 된다.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연구과제 성공률이 무려 97%나 된다.

이쯤되면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 나오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신기술도 많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 많은 연구자들이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수준의 연구목표만 세워서 연구했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연구자가 도전적인 높은 수준의 연구목표를 세웠다가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괜찮을까?

최근 과학계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변화를 이끌기 위한 시도도 이루어지고 있다. 바로 과학연구에 있어 '실패'에 관한 관점의 전환과 실패해도 괜찮으니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하라고 장려하는 것이다.

정부는 올해 2월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운영위원회를 열어 '국가연구개발 과제평가표준지침 개정안'을 심의했다. 이에 의하면 연구과제 성과평가에서 '실패'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고 평가결과 등급을 '우수-보통-미흡'으로 표준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적절한 수행이나 성과를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에 '극히 불량' 등급을 주도록 했다. 또한 정부는 '과학기술기본법' 시행령을 올해 9월에 개정했다. 여기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큰 도전적 연구개발을 장려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한국과학기술원(KIST)은 올해 9월에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과제를 3개 선정해서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KIST 그랜드 챌린지 사업과제'인데 '자폐 조기진단 및 치료', '면역 유도 노화제어', '인공 광수용체 시각 복원' 등 3개 과제가 선정되었다.

삼성전자가 2013년부터 매년 지원하고 있는 '삼성 미래기술 육성 사업'도 실패를 허용하고 있다. 즉 연구자가 도전적인 연구목표를 세워서 진행했는데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대신 그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여 지식 자산으로 활용하도록 한다. 올해 7월에 어드밴스드 인공지능(AI), 차세대 암호 시스템 등 12개 과제가 선정되었다.

◆'실패'를 자랑하고 연구하자!

공개적으로 자신의 실패를 자랑하고 나누는 행사들이 세계 여러 곳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2010년 10월 13일에 핀란드에서 처음으로 '실패의 날'을 만들었는데 2년 후 2012년부터 '세계 실패의 날'로 정해졌다. 이 날에 자신의 실패를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말하며 실패담을 나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2009년에 시작된 '페일콘(FailCon)'이란 학회도 있다. 이 학회는 벤처 사업가들이 자신의 실패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공개적으로 나누는 모임이다. 큰 호응을 얻으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열리는 실패 학회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부터 매년 '실패박람회'를 행정안전부와 중소벤처기업부가 주최하여 열고 있다.

카이스트(KAIST)는 올해 '실패연구소'를 만든다고 발표했다. 이 실패연구소는 내년 초에 '리더의 실패 세미나' 개최를 시작으로 본격 가동될 예정이다. 이 연구소는 과학 연구 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 전 분야의 실패를 연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말이 되어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 중 성공적으로 이룬 것도 있고 이루지 못한 실패한 것도 있을 것이다. '실패'냐 '성공'이냐 같은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내년을 계획해보면 좋겠다. 흔히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듯 실패도 목표로 하는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 한 고개를 넘어가는 것 쯤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그리고 내년 한 해 계획에 실패할 것 같은 목표도 하나 쯤은 슬쩍 끼워넣어보면 어떨까.

김영호 대전과학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