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지도자의 선택이 국민에게 주는 의미

입력 2021-12-20 10:45:31 수정 2021-12-20 17:23:48

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

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
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

2021년이 열흘가량 남았다. 12월 이맘때가 되면 나는 사담 후세인을 떠올린다. 2006년 12월 26일, 이라크 법원은 사담 후세인에 대해 사형을 확정했다. 사형이 확정되고 불과 나흘 만에 그는 교수대에 올라야 했다. 2003년 12월 13일 땅굴에 은신해 있다가 체포된 지 3년 만이었다.

사람들이 후세인을 기억하는 것은 걸프전과 이라크전이라는 두 개의 큰 전쟁 때문이지만, 그를 교수대에 올린 것은 두제일 사건과 쿠르드인 학살 사건이었다. 1980년대 초 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을 때 두제일 마을 주민 140여 명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교수대에 선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후세인은 팔이 뒤로 묶인 채 검은 두건을 쓴 남자 서너 명이 이끄는 교수대로 걸어간다. 그의 목에 굵은 밧줄이 걸려져도 표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한때 아랍의 강자로 군림했던 사담 후세인은 70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담 후세인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힘의 논리와 지도자의 선택이라는 두 가지 이슈다. 1979년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중동은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라는 격변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을 '거대한 사탄'으로 불렀던 호메이니의 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정권이 무너지고 이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이슬람 신정국가가 되었다.

반미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막는 데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1983년 후일 미국의 국방장관이 된 도널드 럼스펠드가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로 바그다드를 방문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미국은 이라크를 직간접으로 지원하면서 호메이니의 이슬람 세력을 저지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물론, 국제 정치의 또 다른 모순이 나중에 발각돼 레이건 정부가 호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1986년 이란에 무기를 팔아 그 이익금을 니카라과 우익 반군을 지원했던 사건 말이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과 미국의 친교(?)는 1988년 이란과의 전쟁이 끝나면서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쟁은 승자 없이 끝났고 세계 정세도 변화하고 있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까지 영향력을 떨치며 위용을 자랑했던 소련은 1989년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공산 소련의 몰락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슈퍼 파워 미국에 이라크는 더 이상 신경 써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은 그의 인생 최대 악수(惡手)를 두었다. 쿠웨이트가 국경 지대에서 이라크의 원유를 도둑질해 간다는 이유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20세기 마지막 전쟁으로 꼽히는 걸프전의 시작이었다. 유엔 헌장 7장이 발동되고 다국적군이 편성되면서 다음 해 1월 17일 바그다드 상공은 공습으로 대낮같이 밝혀진다.

만약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종종 이 질문을 해 본다. 1989년 방문했던 5월의 바그다드는 협죽도 향이 넘치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물론, 강권 통치자 아래서 반체체 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삶은 진행되고 있었다. 티그리스 강변의 식당에선 이국적인 노래가 흘러나왔고 대학가에서는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91년에 태어난 아이는 올해 서른 살이 되었다. 이 아이들은 30년 평생 전쟁과 경제제재, 이슬람국가(IS)에 의한 납치, 살해, 참수 같은 것들만 경험했다. 미국에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된 사담 후세인의 오판은 그 자신은 물론, 이라크 국민의 삶까지 앗아갔다. 지도자의 선택은 이처럼 국민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라크 국민들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없었지만, 민주주의 아래 우리는 선거로 지도자를 선택한다. 지도자의 판단이 국민의 평생을 결정할 수 있다면, 선거에서 그 지도자를 선택하는 국민들은 자신의 인생을 건 선택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