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쓸기 전 해외여행이 가능했을 때 홍콩을 좋아해 자주 갔었다. 어지간한 관광지는 다 둘러보고 신계지역의 홍콩습지공원을 갔을 때 눈을 사로잡은 풍경 중 하나가 높고 좁은 모양의 아파트였다.
아마 홍콩의 베드타운일 법한 그곳의 아파트들은 층수가 족히 30층은 넘어 보였지만 벽면은 엄청 좁아 마치 작은 지우개 위에 연필을 빽빽이 꽂아 놓은 모습이었다.
그 아파트들을 보며 든 생각은 '와, 저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살지?'였다. 내부 면적이 우리나라 원룸 수준으로 좁을 것 같은데 홍콩이 아무리 부유한 도시여도 그곳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결국 극도로 좁은 집을 감내해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홍콩 신계지역의 그 모습이 대구에도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그것도 대구의 가장 노른자위이고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수성구에서 말이다. 황금네거리 인근에는 수성SK리더스뷰와 대우트럼프월드가 들어선 이후 그 뒤쪽에 30~40층을 훌쩍 넘어가는 아파트들이 줄 지어 들어서고 있다. 이미 수성SK리더스뷰 뒤의 조그마한 골목은 양쪽의 거대한 아파트들로 인해 답답함에 어두침침함까지 더해져 점점 을씨년스러워지고 있다.
거기에 최근 주상복합 아파트 한 단지가 더 들어서고, 길 건너편에도 아파트가 들어선다. 아파트 평수야 홍콩 신계지역보다 넓게 만들겠지만, 답답한 모양새는 비슷할 듯하다.
이쯤 되면 아무리 좋은 입지라도 자연 친화는 고사하고 인간 생활에 친화적인 삶을 꾸릴 수 있는 아파트는 꿈에서나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고층으로 올려도 주변 아파트에 둘러싸이게 될 테니 누릴 수 있는 건 '벽 뷰(View)'뿐일 것이다.
또 녹지나 조경 면적은 양념처럼 들어가 있을 테고, 놀이터와 같은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도 썩 넓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입주민 이외에는 아파트 놀이터 사용을 금합니다'와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논란이 일어날 안내문이 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1982년 대구 중구 대봉동에 지어졌던 당시 최고급 아파트인 '한양가든테라스'의 설계 철학이 그리웠다. '예술의전당'을 설계한 건축가 고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가 예술의전당을 짓기 전 만든 '한양가든테라스'는 아파트에 넓은 테라스를 뒀다. 아파트에 살면서도 자연 친화적인 삶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고 김 교수의 건축 철학이 그대로 녹아 있는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이 아파트도 재개발을 위해 철거될 예정인데, EBS의 한 다큐멘터리에 조명된 이 아파트 입주자들의 소감은 "재개발이 아닌 리모델링해서 살고 싶은 곳"이었을 정도로 주민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수성구에 송곳 꽂히듯 들어서는 아파트들을 보면서 이런 건축 철학이 대구에 실현됐었다는 게 너무 신기했고, 대구에 두 번 다시 '한양가든테라스' 같은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슬펐다.
이런 난개발이 일어난 데에는 수성구청의 책임도 적지 않다. 아파트 신축 문제를 놓고 취재하기 위해 만난 수성구민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다른 구에는 이 정도까지 허가를 안 내주는데 수성구는 다 된다"였다. 당장의 아파트 개발로 인한 달콤함에 수성구청이 너무 젖어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봤으면 한다.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