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보다 저항의 삶
신라 화랑도는 세속오계로 사친이효(事親以孝)를 신조로 삼았다. 불교 나라 고려는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으로 부모 은혜를 가르쳐, 현존 최고 고려 판본 경전이 전할 정도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은 천륜과 인륜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강조했다. 왕조가 바뀌고, 사라져도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孝) 가르침은 여전했다.
유학은, 아버지가 아들의 벼리가 되고(父爲子綱), 부자 사이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을 가르쳤고, 효를 늘 중시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사에 부자 간 불효(不孝)와 불화(不和)는 어쩔 수 없었다. 형제 간도 그랬다. 자의·타의든 친일·항일의 갈림에서 독립운동가는 저항의 가시밭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친일 아버지와 항일 아들
대구 사람 윤우열(尹又烈)은 1904년 태어났다.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일본 유학까지 했으나 일제에 맞서기로 했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대구노동공제회·대구청년동맹 등 청년·사회운동에 나서 일제 타도와 새로운 사회 건설을 꿈꿨다. 이런 이상을 이루려고 과격한 방법 동원도 마다하지 않으려 했다.

1926년 1월, 그는 '허무당선언서'로 폭파·방화·총살 같은 직접 행동하는 무력으로 일제에 맞서자며 선전포고 했다. 그는 허무당선언서를 서울의 신문사, 주요 관공서 등 177곳에 뿌렸으나 일제에 붙잡혀 1926년 5월 경성지방법원의 징역 2년형으로 1년 2개월 수감 중 감형, 1927년 2월 출옥했으나 4개월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형 윤홍열(尹洪烈)도 일본 메이지대 법학부를 나와 청년·사회활동가로 활약했다. 또 『동아일보』 대구 특파원과 논설위원장 등으로 망국 지사(志士)처럼 살았다. 반면, 아버지 윤필오(尹弼五)는 한때 대구 달성학교장 등으로 교육가, 계몽운동가 등의 이름을 얻었지만 끝내 친일의 길에서 죽었으니 두 아들에게 부끄럽게 됐다.
독립운동가 김보섭(金普燮)도 윤우열과 상통한다. 본적이 경북 풍산 오미마을이나 관리인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 전남 광주에서 1911년 태어났다. 친일의 아버지 밑, 일제 세뇌교육에도 저항의 삶을 살았다. 광주고보 때 무등산에서 비밀 독서회를 조직했고,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위 대열에서 앞장 섰다.
결국 1930년 3월 퇴학처분으로 학교를 떠났고 옥살이까지 했다. 1930년 광주학생의거로, 광주지방법원의 1심 재판에 이어 대구복심재판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혀 5월 15일 금고 6개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아 풀려났다. 그러나 1931년 6월 13일 독서회 활동으로 대구복심재판을 받은 결과 또 징역 2년 선고로 대구형무소에서 보냈다.

그리고 김보섭은 1942년 32세로 순국, 광복의 빛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 김면수와 형 김영섭은 일제 관리로 친일의 협력으로 뒷날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김보섭의 다른 형(김진섭)은 문학계(수필)에 이름을 남겼고, 또다른 동생(김만섭)은 의료인으로 살았으니 가족의 삶이 친일과 항일로 얽혔다.
대구 부호로,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다 친일파 행적의 이병학(李柄學)의 장남 이장희(李章熙)는 비운(悲運)의 희생자였다. '봄은 고양이로다'라는 시로 더 알려진 이장희는 21명 자녀의 장남으로 총독부 관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 기대를 저버리고 자살로 삶(1900~1929)을 마쳤으니 비명(非命)의 삶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대구의 유지였던 서상돈(徐相墩) 아들 서병조(徐丙朝)는 아버지 이름을 망친 인물이 됐다. 국채보상운동 지도자로 오늘날까지 명성이 빛나는 아버지가 닦은 탄탄한 기반 위에 유복한 길을 걷던 서병조는 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으로 친일에 앞서 여러 자리를 차지했으나 광복 이후 체포 등으로 집안에 누명(陋名)을 남기게 됐다.

◆일제 관리'광복회 활동 '형제 엇길'
강제로, 혹은 자의로 친일과 독립운동의 길에서 갈라진 형제도 숱했다. 이런 통한의 역사는 광복 이후 이념갈등, 남북분단, 한국전쟁사로 이어졌으니 35년 식민 지배의 강점시기는 70년 넘도록 골육상쟁(骨肉相爭)하는 잔혹사의 출발이었다.
여기 경주 최부자 최준(崔浚) 형제 사연이 있다. 아버지 최현식(崔鉉軾)은 1907년 경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며 국채보상경주단연회사 회장을 맡았다. 특히 지난 2018년 최부자 집안에서 당시 옛 자료가 발굴됐는데, 그가 살던 경주에서 5,100명이 모여 3,304원 29전을 모금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최현식의 4남 2녀 자녀 가운데 4형제는 기구했다. 장남 최준(1884~1970)과 차남 최윤(崔潤·1886~1969), 3남 최완(崔浣·1891~1926), 막내 최순(崔淳· 1892~1949) 가운데 최준·최완은 독립운동가로, 최윤은 형 대신 억지로 중추원 자리를 맡았고, 막내는 광복 이후 좌익에게 암살됐으니 말이다.
최준은 1915년 2월 28일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원으로 윤상태 통령 등과 활동하면서 그해 8월 2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에 사촌 자형 박상진 총사령을 도와 재무부장이 됐고, 부산에서 세운 백산무역을 맡아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몰래 보내는 일까지도 맡았다.
그런데 셋째 동생 최완은 임시정부 일을 하다 젊은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광복 이후 김구가 1946년 최준을 만나 감사를 전할 만했다. 특히 최준은 유지들과 함께 1947년 옛 대구대학 개교에 재산을 기부하여 삶의 마지막까지 나눔과 책임 정신을 실천했다.


1892년 대구에서 태어난 의사(醫師) 김문진(金文軫)과 작가(作家) 동생 김문집(金文輯)의 엇갈린 삶도 비슷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 세브란스의전 3년생 김문진은 대구 독립만세운동 권유 활동과 경남 마산에 배포할 독립선언서 전달 역할 등을 했고, 졸업 뒤 의사로 살다 1925년 34세로 삶을 마쳤다.
10남매 장남인 그의 행적과 달리, 동생 김문보(金文輔·1900년생)는 일본 유학과 음악인의 길을 걸었고 일본인 여성과 결혼,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일본에서 대학 중퇴 뒤 귀국했던 동생 김문집(1907년생)은 작가, 문학평론가로 결국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다.
자의든, 타의든 35년 간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역사가 남긴 암흑사가 어찌 이들 가족뿐이랴.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아직도 이런 망국의 휴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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