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 역사저널리스트
"붉은 비 내리고 녹음은 살찌는데 거센 바람이 물결을 치매 조수(潮水) 소리가 장하구나."
조선조 중종 연간에 영의정을 지냈지만,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를 숙청한 죄로 훗날 삭탈관직당한 남곤(南袞)이 읊은 시다. 바람이 물결을 쳐 파도 소리가 웅장하다는 그곳은 울돌목. 바윗돌이 우는 길목이란 뜻으로 한자로는 파도가 소리를 내 운다는 '명량'(鳴梁)이다. 한민족의 무궁화 동산 남쪽 맨 끝자락인 해남과 진도 사이 바다를 가리킨다. 2014년 최민식이 이순신 장군으로 열연해 무려 1천761만 명의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그러모았던 블록버스터 '명량'의 바로 그 명량해협이다.

"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의 성원과 지지가 남아 있습니다." 지난달 폐막한 2020 도쿄 올림픽 한국선수단 선수촌 벽면을 장식했던 격려 문구다. 비록 일본의 항의와 IOC의 권고로 내려졌지만, 극일의 상징과도 같은 이순신 장군의 "今臣戰船尙有十二(금신전선상유십이) 出死力拒戰(출사력거전) 則猶可爲也(칙유가위야)/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능히 해볼 만하다"는 결기가 일본의 심장부 도쿄에 울려 퍼진 것 자체로 국민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어쩌다 12척 배로 왜군에 맞서야 했을까?

1592년 4월 13일 부산포를 장악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했지만,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막혀 조선 전체 장악에 실패했다. 풍신수길은 1597년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2차 공격을 지시했다. 역사에서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왜장 소서행장은 이순신 장군을 제거해 바닷길을 장악하지 못하면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해 교란 공작을 폈다. 간첩 요시라를 보내 소서행장의 경쟁자 가등청정이 조선을 재침할 것이니 상륙 전에 그를 치라는 정보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 흘렸다. 보고를 접한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지만, 왜군 공작을 의심한 이순신 장군은 출전을 미뤘다. 조정은 임금의 명을 거역했다며 이순신 장군을 해임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다.
현지에 내려와 전쟁을 총지휘하던 체찰사 권율은 원균을 심하게 매질하며 출전을 독려했고, 치욕을 맛본 원균이 무리하게 출전해 거제도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하며 원균 자신도 왜군에게 참살당했다. 160척에 달하던 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함대가 궤멸당하는 가운데, 경상우수사 배설이 간신히 12척을 이끌고 탈출한 덕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 손에 12척의 배가 남게 된 것이다. 이순신은 전열을 정비한 뒤, 1597년 10월 26일 울돌목으로 왜군을 유인해 조류를 활용한 전술로 대승을 거두고 제해권을 재장악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대목은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 적군인 왜군이 아군인 조선군 지휘부를 사실상 구성했다는 점이다. 이순신이라는 최강의 장군을 몰아내고 만만한 원균을 전투 상대로 고르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선출을 놓고 역선택 논쟁이 불거졌다. KBC 광주방송과 JTV 전주방송이 8월 22~23일 호남지역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호남 지역에서 보수 진영 대선후보로 홍준표 후보 18.5%, 유승민 후보 16.8%, 윤석열 후보 9%가 나왔다. 이는 민주당 후보들을 제외한 가운데, 민주당 후보랑 싸울 국민의힘 후보로 누가 적합한지 물음에 대한 역선택이다. 만만한 조선군 장수를 고르던 방식으로 야당의 대선후보를 선택한다는 논란 자체에 아연실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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