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가짜부부·기생 낀 유흥객…목숨 건 항일 위장술

입력 2021-08-06 14:00:00 수정 2021-11-19 16:39:32

위장 폭탄 반입·미친 척 행세 하기도

빨래터 가는 것으로 위장했던 3.8대구만세운동 때 신명여학생들
빨래터 가는 것으로 위장했던 3.8대구만세운동 때 신명여학생들
위장 무기 반입한 김시현
위장 무기 반입한 김시현

일제는 한국을 위장의 사술(詐術)로 삼켰다. 그 출발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었다. 일제는 조약 1조에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며 한국의 자주 독립을 바라는 것처럼 위장(僞裝)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제1조에서 '일본국 정부는…한국의 외교를 감리, 지휘하며…한국인과 그 이익을 보호한다'로 바꿨다.

마침내 1910년 합방조약 제1조에서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며 34년만에 본 속셈을 드러냈다. 1592년 임란 이후 318년만에 한국 정복의 야욕을 이룬 셈이다. 무력을 앞세운 일제 침탈과 음흉한 위장 음모를 꿰뚫지 못한 조정의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 위정자 탓에 결국 한국은 망하고 말았다.

나라 잃은 한국인은 마땅한 응징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변장·변신, 위장의 투쟁은 어쩔 수 없었다. 일제는 자신들이 친 2,3중의 그물 감시망도 모자라 그들 고백처럼 '신출귀몰한' 항일 투사 체포를 위해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이는 일제 경찰의 한인 투사 체포 자료집인 『조선사상범검거실화집』에 잘 표현돼 있다.

'불휴불식(不休不息), 불면불휴(不眠不休) 활동, 철야하면서 추구하고 발각되지 아니하게 주야로, 주야불휴(晝夜不休)로 계속 신문하며 한 잠도 자지 못하다, (경북)도내 1,600명 경찰관은…불면불휴의 수사를 계속, 질풍신뇌적(疾風迅雷的)으로 관계자 전부를 일망타진하여 주야겸행(晝夜兼行)으로 취조에 종사, 이주야(二晝夜)의 필사적 노력과 주야겸행 물샐 틈도 없는 수사망, 주야겸행 취조, 수일 동안 산수수사(山狩搜査),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김준연 등 유력 사회인 수사·체포에 반대하는 서장과 상부에 사표 내고….'

가짜부부로 의열단의 무기수송에 도움을 준 기생출신 현계옥
가짜부부로 의열단의 무기수송에 도움을 준 기생출신 현계옥
무기 운반 도운 기생 현계옥(맨 오른쪽). 가운데는 사상기생 정칠성
무기 운반 도운 기생 현계옥(맨 오른쪽). 가운데는 사상기생 정칠성

◆기발한 위장술, 독립의 길 트다

일제는 온힘을 쏟아 저항 한국인 즉 '불령선인'(不逞鮮人-말을 잘 듣지 않는 한국인)을 체포·고문했다. 특히 최석현(崔錫鉉) 등 일부 한국인 고등계 경찰은 눈물겹게 충성을 바쳤다. 그야말로 한국은 어느 외국인 글처럼 '온 나라가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고, 모두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의 결과였다.

한국인은 목숨을 걸고 독립의 길을 터야 했다. 애국지사는 경찰·헌병, 앞잡이·끄나풀·밀정의 감시를 뚫고 비밀결사를 꾸리고, 군자금을 모으며, 친일파·일제 관료를 처단하고, 식민통치기관·시설을 파괴했다. 일제 눈을 피하는 위장의 투쟁은 마땅했다. 당시 재판과 문헌 등을 통해 일부나마 남은 위장 사례는 대략 다음 같다.

대만에서 일 왕족 처단한 조명하 보도와 친필 편지
대만에서 일 왕족 처단한 조명하 보도와 친필 편지
대만에서 일 왕족 처단한 조명하
대만에서 일 왕족 처단한 조명하

'가마니 은닉 탈주범 화물 위장 일본 탁송(강창보), 가짜부부(김구·중국인 주진애, 현계옥·헝가리인 마자르), 질항아리 고추장·반찬 위장 다이너마이트 인수(김영우), 위장 곡물상(윤상태 서상일 등), 김동삼 친척위장 옥바라지로 동지 연락·하얼빈 중국인 걸인 노파 위장 무기·폭탄 운반(남자현), 꿀 선물상자 위장 폭탄 조선은행 대구지점 배달(장진홍), 단발계(斷髮契) 위장 비밀결사(정현수 등),

대만 일본인 농장 위장취업과 일본 왕족 단도 처단(조명하), 위장 만주 동광상점(김법린), 미치광이(주석환), 벙어리(이수택), 선물상자 위장 폭발장치 매국노 박제순·이지용 선물(나철·이기 등), 약속어음(군자금 공채) 위장 독립군자금(김홍규), 위장 자전거포 경영(차병수), 가족 유람관광객(기생 동행 취객위장 인력거 무기 은닉 월경·김시현 등 의열단 일행), 일본군 군속위장 활동(김순근), 일본 군관(반치중)·일본 수비대(안종구)·일본 헌병대 관련자(정태희) 위장,

일본영사관 순사 위장취업 영사관 무기 독립군 전달(조두용), 상해조선사업 위장 공작선 건조(안정근), 위장 친목계(장세진 등), 친일인사 위장 일본군 간첩 접근 처단(염재영), 특별기도회 종교기도문 위장 독립군자금 모금(홍순의), 평양 기흘병원 환자위장 입원(김석황), 중국 궤짝위장 무기·폭탄 운반(이성우), 회사 설립 주식금 모집위장 독립군자금 모금(김규흥)…'

걸인 변장과 위장 옥바라지로 비밀 연락 활동을 했던 남자현
걸인 변장과 위장 옥바라지로 비밀 연락 활동을 했던 남자현

◆목숨 건 위장술, 독립 서광 비추다

독립투사의 위장은 유연했다. 긴 준비와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능수능란한 임기응변의 위장은 기발했다. 신체 장애를 가장해 벙어리 흉내낸 이수택, 아예 미친 척한 행동과 여장(女裝) 등으로 경찰의 허를 찌르며 저항한 주석환의 사연은 놀랍다. 여장부 애국지사 남자현의 걸인 변장과 투옥된 김동삼 친척을 위장한 옥바라지와 함께 이를 활용한 비밀 전달과 동지 접촉 활동은 대담했다.

위장 부부도 빠질 수 없다. 상해 망명 백범 김구와 중국인 여성 주진애가 그렇다. 특히 대구의 애국지사 현정건과 망명 활동을 펼친 기생 현계옥이 의열단의 무기제조에 도움을 준 헝가리 제대 군인 마자르와 부부 행세로 무기(폭탄) 수송에 나선 사연은 유명하다. 이들 동료는 호화 나들이객으로 꾸며 1923년 3월 기생까지 동행, 술에 만취해 호기롭게 일렬종대로 인력거 행진 끝에 국경 철교를 건넜다. 폭탄은 기생이 탄 선두 인력거에 감췄다. 『매일신보』는 이듬해 1924년 4월 25일 '기생 이용 폭탄 비밀 운반, 기생 탄 인력거 속에 폭탄 몇 개를 감춰 국경 경계선 돌파'라는 기사로 알렸다.

기생 탄 폭탄 수송 기사
기생 탄 폭탄 수송 기사

가마니에 항일 투사 강창보를 숨겨 탁송 화물로 위장해 탈출시킨 제주인, 선물 포장을 위장해 폭탄을 보내 을사오적 처단에 나선 나철·이기 등의 위장 활동, 반찬 위장 항아리 속 은닉 다이너마이트 인수한 대구의 김영우 사례도 있다, 대만의 일본인 농장에 위장 취업해 1928년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육군대장을 독이 묻은 보검도로 처단하고 24세에 순국한 조명하 의거도 남다르다.

을사오적 처단에 나선 이기와 나철(왼쪽부터) 등
을사오적 처단에 나선 이기와 나철(왼쪽부터) 등

항일 투사들은 일본군 군속(김순근) 또는 일본군 군관(반치중), 일본군 수비대(안종구), 일본헌병대 관련자로 위장(정태희)한 대담함도 보였고, 일본영사관 순사로 위장 취업해 영사관 무기를 독립군에게 전달(조두용)했다. 만주에서는 친일파를 위장해 접근, 간첩으로 활동하던 일본군 처단(염재영)도 감행했다.

아울러 경북 칠곡 왜관의 향산상회(윤상태) 등 국내외 위장 점포(가게)는 군자금 마련과 비밀 활동의 터전이 됐다. 또한 회사 주식 대금이나 약속어음을 위장해 군자금 용도로 썼다. 이밖에 전통 형태의 친목계·학술연구 위장의 비밀결사 등 온갖 위장은 광복을 앞당긴 투쟁의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