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입력 2020-12-30 09:55:49 수정 2020-12-30 16:32:20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피크엔드 법칙'(Peak-End Rule)이란 것이 있다. 이 법칙은 1999년 이스라엘의 심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제시했다. 내용을 뜯어보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과 비슷하다. 카너먼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가장 극적인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국한되며 인생 경험의 긴 과정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또렷한 기억, 역시 가장 고통스러웠거나 행복한 순간이 아니면 마지막 순간의 경험일 것이다. 뇌의 이러한 기억 성향 때문에 우리는 경험의 길이보다는 경험의 깊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2020년 경자년 한 해도 좋은 결과를 바라보며 달려왔다. 역병으로 힘들었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길을 막았지만 인내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자포자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마음이 들려주는 '유종의 미'가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두려움과 불안이 가슴을 억누르고, 고통의 압박이 강력해도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힘은 놀라웠다. 아직 터널의 끝이 보이진 않지만, 좋은 결말, 끝이 좋으면 다 좋을 내일을 소망하며 오늘을 견딘다.

그래서 그런지 셰익스피어의 희곡 '끝이 좋으면 다 좋아'(All's Well That Ends Well)는 제목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좋은 결과,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역경의 세월을 극복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많은 독자가 좋은 결말에 감동한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좋은 결말이 잉태하는 비극적 과정을 통해 인생의 깊이와 행복의 근원을 보여주는 것 같다. 헬레나는 남편 버트램이 자기를 피해 전쟁터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괴로워했다. "극도로 굶주려서 으르렁대는 탐욕스러운 사자를 만나는 편이 지금의 처지보다는 차라리 낫겠구나. 이 세상의 불행을 지금 당장 나 혼자서 짊어지는 편이 차라리 낫겠구나."(3막 2장 116~119) 셰익스피어는 끝이 좋았기 때문에 다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과정에서 만들어낸 고통의 깊이가 끝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 건강한 삶을 소망한다. 현대인들에게 건강은 숭배의 대상이고, 오래 사는 것은 염원이다. 그만큼 우리는 건강을 추구하고, 오래 사는 것을 소망한다. 그렇지만 아무런 사건도 없고, 어떤 추억도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행복한 삶은 무한대의 시간을 소비한다고 이뤄지는 것도, 단순히 사건들을 많이 모아 놓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행복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 경험의 농도에 달려 있다. 사건을 나열한다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되려면 사건이 의미를 빚어내야 한다. 아주 짧은 이야기라도 사건의 농도와 그것이 빚어내는 의미에 따라 엄청난 서사적 흥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복(至福)은 역경의 시간에 그 의미를 냉철하게 음미하고 밝혀내는 데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고통받는 인간만이 '영원한 것의 향기'를 맛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1~4) 위대한 신앙인은 환란 가운데서 소망을 봤다. 2020년은 어려운 한 해였고, 2021년 신축년도 힘든 한 해가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고통과 역경의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의 의미를 되씹어 충일한 시간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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