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재현의 사진, 삶을 그리다]오늘은 내가 내일은…

입력 2020-12-28 14:00:00 수정 2020-12-28 18:20:43

대구 성모당 성직자 묘지 2017
대구 성모당 성직자 묘지 2017

석재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
석재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대표

바쁜 일상이 기억나지 않는 곳, 날씨가 더 따스한 곳, 다른 대륙으로 떠나는 꿈, 작년만 해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기엔 그런 일상의 떠남이 가능했다. 미뤄 뒀던 휴가를 내고 부푼 가슴 부여안고 해외로 떠날 수도 있었고, 해돋이 명소를 찾아 1박 2일 정도 가족이나 친구와 떠나는 여행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5명이 함께 외식마저 할 수 없는 시간들이 주어지니 2020년 한 해는 코로나로 시작해서 코로나로 징글징글하게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와 더불어 산 까닭일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는 전쟁이나 분쟁과 같은 정치적 이슈, 환경 문제처럼 심각한 사회적 이슈가 아닌, 그저 잔잔히 보고만 있어도 평온한 감성을 전하는 작품들을 소개할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묵직한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역의 사진가 이성호는 2016년부터 정미소며 사라져 가는 옛 풍경을 기록으로 남기는 근대 가옥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예천 마원성지 2019
예천 마원성지 2019

대구를 중심으로 구도심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을 작업하다 그는 성모당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성모당은 전국에서 성지순례를 오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신자가 아닌 이들 또한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을 때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화되는 느낌, 그 역시 이곳에서 그런 감성과 마주하게 된다. 비록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주교들과 선종한 성직자들을 모신 그곳에서 성자들의 아우라를 경험하기도 했고 개인적인 위로와 위안 역시 찾아들었다.

사진가 이성호의 시리즈 제목은 'Hodie Mihi Cras Tibi'이다. 성모당 성직자 묘지 입구에 크게 아로새겨진 이 글귀는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라고 한다. 처음엔 단순히 수많은 이들의 무덤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무덤 중에 스민 해외 선교사들의 희생을 마주하게 되면서 그 가치가 더욱 귀하게 다가왔다. 공간이 지닌 영성적인 느낌을 담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칠곡 한티성지 2017
칠곡 한티성지 2017

그래서 여러 차례 성모당과 성직자 묘지를 찾던 그는, 그 공간을 전국으로 확대해 제주도에 있는 눈물의 십자가, 청양 다락골 성지, 문경 마원성지, 익산 나바위 성당, 전주 치명자산 성지, 안성 미리내 성지까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가톨릭 성지를 작품 속에 녹여냈다. 수난과 박해의 시대를 지나온 그곳의 아픔을, 종교와 인간의 역사가 날것처럼 뒤엉킨 그곳은 살아 숨 쉬는 한국의 근대사였다. 성모당과 무덤에서 시작한 그의 작업은 이제 과거 서민들이 오롯이 성소라 생각하며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공간, 공소로 이어지고 있다.

익산 나바위성지 2019
익산 나바위성지 2019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은 세상 가장 확실한 진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불확실한 진리와 늘 함께한다. 뭐 그렇다고 우울할 필요는 없다.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빛나는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더 아끼고 소중히 살 수 있는 깨달음을 주니까 말이다. 그렇게 산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녹록지 않은 한 해를 잘 견디고 버텨낸 자신에게 토닥토닥 위로의 말을 건네며 며칠 남지 않은 2020년을 잘 마무리해 보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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