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3일. 외할머니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실 곳으로 떠났다. 날이 좋았고 바람도 적당했다.
내 나이 27살. 나에게 하루도 외할머니라는 존재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날 이후로 난 외할머니를 마음속에만 담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서울에 있는 손자, 손녀는 물론 대구에 있는 손자, 손녀도 당신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하지 못했다.
아들 한 명, 딸 두 명, 며느리 두 명, 사위 한 명, 당신의 오빠, 언니네 가족들이 곁을 지켰다. 손님들도 많이 오지 못해서 당신의 자식들만 조용히 곁을 지켰다. 마음껏 슬퍼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했던가… 난 그래서 멀리서 더 울고, 더 슬퍼했다.
그렇게 나의 엄마가 엄마를 보냈다. 언젠가 나의 엄마가 술에 취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술주정을 한 적이 있다.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가 내뱉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말들을 잊지 못한다. 그런 그녀가 이제 자신의 어머니마저 그리워하게 되었다.
물론 요양병원에 계시면서 최근 들어서는 말씀도 안 하시고, 움직임도 적어졌던 어머니지만. 목욕탕 다녀오면서 잠깐, 딸이나 아들이 오면 또 잠깐 그렇게 들러서 때로는 딸기 요플레를, 때로는 바나나를 사 들고 그렇게 보러 가던 엄마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슬펐을까. 앞으로 얼마나 무수히 많은 날을 요플레나 바나나같이 사소한 그 어떤 것을 보면서 문득 엄마가 떠올라 슬퍼할까?
언젠가 기억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의성에 있는 외가댁을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외할머니께서 요양원에 계실 때 외가댁이 대대적인 수리를 했었다. 곧 철거되는 별채에서 엄마의 추억이 담겼을 만한 물건들을 챙겨 나왔었다.
그중 엄마의 학창시절 수련회 기념품이 있었고 난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챙겼다. 그러나 엄마는 기념품을 보고 크게 반가워하지 않았고 구태여 그것을 챙겨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치 철거될 때 그 물건은 함께 무너져도 된다는 듯이.

그런 엄마가 외할머니의 은비녀가 어디 있는지 한참을 찾을 때, 기억과 추억에도 무게가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좋더라도 모든 기억과 추억이 같은 무게로 소중할 수는 없다. 모두 지니고 살기엔 무거울 테니까. 무너져가는 기억의 건물 속에서 함께 보내줄 수 있는 추억과, 기억의 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가져가고 싶은 추억이 있다. 엄마에게 외할머니의 은비녀는 아주 무거운 추억이 담긴 물건이었고 이제는 요플레나 바나나도 엄마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잡게 되었다.
얼마 전 코로나가 잠잠해졌을 때, 외할머니가 떠나시고 처음으로 산소에 갔었다. 외할머니께 늦은 인사를 드리고 외할머니께서 자주 가셨다던 경북 의성 대곡사에 갔다. 외가댁에서 차로도 거리가 꽤 되었으니 그 옛날은 아주 먼 거리였을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큰 산을 넘고 그 먼 길을 걸어 이곳 대곡사에 오셨고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그 수많은 걸음으로 외삼촌이 태어나셨다. 다음 사랑으로 이모가, 그리고 막내인 엄마가 태어났다. 무수한 그 사랑이 엄마에게 전해지고 또 나에게 전해졌다고 생각하니 내가 소중해졌다.
그래서 오늘도 외할머니를 떠올리며 나는 자신을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행복해지기로 했다. 깡마른 손으로 나를 잡아 주시던 손길에, 말없이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시던 그 깊은 눈에, 쌈짓돈을 모아 건네던 용돈에, 내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당신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테니까. 기꺼이 당신에 대한 추억에 무게를 무겁게 가지고 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외할머니(김원규)를 사랑하는 손녀딸(임예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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