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의 영국이야기] 우아한 삶을 위한 실용적 도구

입력 2020-12-07 14:30:00 수정 2020-12-07 16:20:13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이진숙 문화칼럼니스트

홍차는 영국인에게 특별한 존재다. 그냥 음료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삶의 방식이다. 계층을 막론하고 온 국민이 오전에 한 잔 오후에 한 잔은 기본이고, 언제든지 생각날 때마다 마신다고 봐야 한다. 일 년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는 영국 날씨는 홍차 마시기에 적합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 춥고 우울한 겨울에는 물론이고, 서늘하다 못해 쌀쌀하기까지 한 여름에도 따끈한 차 한 잔이 굴뚝같다.

홍차 마시기는 영국인의 비사교적이고 내성적인 성향을 숨기는 행위이다. 그들은 괜스레 인사를 했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 불편해 낯선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는다. "Would you like to drink a cup of tea?"(차 한잔 하실래요)는 쌀쌀맞아 보이고 과묵한 영국인이 자주 하는 말이다. 영국인은 차 한 잔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차 한 잔을 마시면서야 서로를 알게 된다.

"I'll put the kettle on."(가서 주전자를 올려놓을게요)이라는 말은 분위기를 바꿀 때 유용하다. 인사하는 데 낯설고 어색할 때는 이렇게 말하고 불편한 정적을 비켜간다. 할 말이 막혀 난감할 때도 차를 끓여 난처한 상황을 모면한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나 돈 얘기를 해야 하는 곤란한 순간에도 "그럼, 차라도 한잔" 하며 불편한 순간을 뒤로 미룬다. 큰일이 났거나 충격을 받았을 때도 찻물을 올린다.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차에 기대고, 신체의 통증과 괴로움을 차로 달랜다.

영국인은 '차 마시는 시간'을 따로 두고 산다. 하루 중 제일 기분 좋은 시간은 일하는 시간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쁜 일상을 느긋하게 만들어 주위를 돌아보고, 고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숨을 고르며 여유를 챙긴다. 처음 영국에 갔을 때, 우리 집에 이삿짐을 나르던 아저씨들이 일을 멈추고 차를 청해서 당황했다. 남편 직장에 오전과 오후에 티타임이 있고, 차를 우려 주는 티레이디(tea lady)까지 있어서 놀랐다.

홍차와 가장 잘 어울리는 티푸드는 '스콘'(scone)이다. 밀가루에 버터를 듬뿍 넣고 구운 스콘에 크림과 잼을 발라 함께 먹으면 '크림티'(cream tea)고, 오후 네 시쯤 샌드위치와 케이크를 곁들여 먹으면 '애프터눈티'(afternoon tea)다. 고소하고 달콤한 스콘을 한입 베어 물면 "아~" 하고 탄성이 나온다. 영국에는 티룸이 많고, 영국인의 행복에는 차가 필요하다.

영국인은 쉬기 위해서 차를 끓이고, 행복의 순간을 위해서 차를 마신다. "Wouldn't it be dreadful if you live in a country where they didn't drink tea?"(차를 마시지 않는 나라에 산다면 삶이 너무 삭막하지 않겠느냐)라고도 한다. 차는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차는 우아한 삶을 위한 실용적 도구다.

우리에게도 쉬어갈 수 있는 자극적이지 않은 뭔가가 필요하다. 무뎌진 감각을 깨워줄 향긋한 뭔가가 필요하다. 친구와 마시고, 동료와 선후배와도 마시고, 남편과도 차 한잔을 마셔 보자. 늘 관계로만 대하던 시어머니와 며느리도 함께 차 한잔을 마셔 보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에는 여유가 생기고, 마음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나눌 이야기가 많을수록 삶은 더 깊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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