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헌호, 신부, 천주교대구대교구 소속
태어나서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살았던 고향 거창에서 아이들 놀이터가 따로 있었던 기억이 없다. 온 천지가 아이들 놀이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놀이의 종류도 많아서 해가 서산을 넘고 어두워지는 것이 집으로 향하게 했지 놀 것이 부족하여 그런 적은 없었다.
이른 봄, 집 앞의 한들에 나가면 저 멀리 야트막한 보리밭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그 속 어디선가 갑자기 종달새가 하늘 높이 직선으로 솟아올라 신나게 노래하다가 내려앉곤 했다. 가까운 산언덕에 진달래가 짙은 분홍색으로 피어나면 또래의 아이들과 진달래를 먹기도 하고 꺾어서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진달래의 그 고유한 향기와 맛은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도 떠올라 입안에 맴돈다.
초등학교 2학년 올라오면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대구로 와서도 큰 변화는 없었다. 동촌초등학교로 전학하여 만난 같은 반 동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사과밭집 아들딸이었다. 이따금 그들의 집으로 놀러 가면 하얀 사과 꽃들이 만발한 사과나무 아래는 이야기하고 놀기 좋은 놀이터였다. 물론 가을에는 잘 익은 사과들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었다. 돈이 되는 잘생긴 사과들은 나무 박스에 고이 담아 따로 챙겨둔 뒤였기에 벌레 물어 썩은 자국이 있거나 흠이 있는 것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되어 비로소 구경하게 된 서울도 한낮에는 여유가 있었다. 시내버스를 타면 앉을 수 있었고 주말에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등을 가면 한적한 곳을 쉽게 만날 수 있어서 일행들과 준비해 간 음식을 먹으며 얘기꽃을 피우다가 저녁 무렵 그리 복잡하지 않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오곤 했다.
지난 60년 동안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한번 잘살아 보려고 참으로 열심히 배우고 일했다. 우리만이 아니라 자자손손 잘살아 보려는 의도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게 하여 배고프던 보릿고개는 오래전에 넘어서서 요즘은 그 단어조차 낯설어졌고, 전국 어디나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도로와 교통 사정이 좋아졌다. 눈을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어디서나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찬 마트들을 쉽게 볼 수 있고, 각종 가게들과 음식점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60년 전에 비해 국민소득이 300배나 되어 대부분이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법 강한 강도로 우리를 압박하는 무엇이 있다. 아지랑이와 종달새 그리고 우리의 놀이터였던 거창의 그 넓은 한들은 도로들로 이리저리 쪼개지고 군데군데 각종 건축물들로 채워져 있다. 동촌에서 영천까지 죽 이어져 있던 사과밭은 그동안의 개발로 많은 부분이 주거지로 바뀌어 높고 낮은 온갖 종류의 건물들이 들어서서 건물 밭으로 변해 있다. 그 많던 사과나무들은 지구온난화로 모두 북쪽으로 쫓겨나서 구경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모든 것이 풍부해져서 좋은 것과, 빽빽한 건물들과 자동차들로 채워져서 친구들과 대화할 여유를 잃은 것 사이에 서서 이 모든 현상이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지 물어본다. 10년 앞은커녕 내일은 또 무슨 놀랄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내일 걱정은 내일 하고 오늘은 오늘 걱정만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부처님도 마음을 비우고 현재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고, 공자님도 현실에 충실하라고 하신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앞날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런가 보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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